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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정민수가 짜증내며 소리치곤 했던 히스테리성 간질(hysterical seizure)증상이다.그러나 임희경은 그런 자신을 억지로 가라앉혔다.그래봤자 이 다리 위 거지 앞에서 별로 얻을게 없을 것 같다는 계산이 재빨리 됐기 때문이■ .잘못하다가 강간이나 당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사람이 죽겠다는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구경만 하다니….』 『그 사람 내공이 나보다 강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간만에 강적을 만나 소주 병나발 불며 쌓인 회포다 풀고 흔쾌히 보내줬지.그 사람 아마 웃으면서 죽었을 거야.
내가 화성연쇄살인 범인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낄낄거리며 웃다가 뛰어들 었지.되게 행복해 하더구만….』 『당신 화성연쇄살인 범인이에요?』 희경이 깜짝 놀라 물었다.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가 다 한 것은 아니야.5명 이후부터는 내 추종자들이 한 짓이라구….』 희경은 갑자기 겁이 벌컥 났다.이 사람은 어쩌면 정신병자일지도 모른다.화성연쇄살인 사건이 한창 시끄러울 때 정신병자들 사이에서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게 유행이었다고 정민수가 말한 적이 있었다.정신병자들은 하나같이 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인물로 안다나….
『왜 갑자기 겁나우!겁먹지 마.죽겠다고 올라온 사람이 그까짓강간 살인범에게 놀라기는…이렇게 생각해.어떻게 죽건 죽는건 매한가지라고….』 『왜 그런 짓을 했어요?』 희경은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물었다.그래 어차피 죽는 것,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자살해 죽으나 미친 개한테 물려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다.
『심심해서… 하도 인생이 권태로워 뭘하면 이 권태가 없어질까찾다가 시작했지.인간이 가진 삶의 본능,죽음의 본능을 아주 원시적으로 스릴있게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권태 때문에 사람을 죽여요?』 『당신 권태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우?』 『전 여태까지 권태를 느낄만큼 그렇게 한가로운 적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행복한 거야.권태를 모르고 사는 것 만큼 행복한 것도 없지.사실 나 정도 수입이면 세상에 반반한 여자들은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어.하지만 돈만 보고 고분고분한 여자들 어디 재미가 있어야지.』 거지는 잠시 입맛을 다시더니 희경을 힐끗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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