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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서 ‘女心’ 잡고 살아난 힐러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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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 10면

힐러리는 대의원 수 격차를 줄이지 못했으나 심리적으로는 완전히 기세를 회복했다. 오스틴 AP=연합뉴스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경선 시작 전 힐러리는 절대 강자였다. 지난해 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2008년 힐러리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막상 경선이 시작되자 힐러리는 아이오와(1월 3일)에서 오바마에게 일격을 당하고 뉴햄프셔(1월 8일)에서 간신히 소생했다.
2월 이후에는 11개 주에서 연패를 당해 중도 사퇴 압력에 시달렸다. 공화당이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대선 후보로 정하자 민주당 내부에선 “소모적인 당내 경선을 빨리 마감하고 본선에 대비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면서 그를 다그쳤다. 수퍼 대의원(중앙당 간부, 당 원로, 연방 상·하원 의원, 주지사 등)들도 속속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다.
‘미니 수퍼 화요일(4일)’ 이틀 전인 2일 FT는 힐러리의 중도 퇴장을 점쳤다. 그러면서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힐러리의 진실성 부족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힐러리는 버몬트만 넘겨주고 오하이오·텍사스·로드아일랜드에서 이겨 다시 컴백했다.
복합적인 요인이 힐러리의 회생에 기여했다. 출구조사 결과 힐러리는 오바마에게 잠식당하던 지지층을 다시 결집시켰다. 연 소득 5만 달러 이하 유권자, 고졸자, 여성, 노동자 등이 그들이다. 특히 뉴햄프셔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여성 유권자들이 그를 살렸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힐러리가 벼랑 끝에서 인간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자 표심이 움직였다. 경제살리기를 강조해 실업과 주택시장 붕괴로 고통 받는 유권자들의 발길을 돌렸다.
오바마는 ‘티끌 모아 태산’ 전략으로 대의원 수가 작은 주(州)에서 승리해 대의원 수를 늘렸다. 이번에는 큰 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힐러리 전략이 주효했다. 네거티브 전략도 먹혔다. 새벽 3시에 백악관으로 국가안보 위기상황을 알리는 전화가 온다면 수화기를 누가 드느냐 하는 컨셉트의 TV광고를 내보냈다. 오바마는 경험이 적어 불안한 반면 힐러리는 북아일랜드 평화회담, 코소보 난민 위기, 중국 여성 인권 옹호, 상원 군사위원회 활동 등으로 외교·안보 분야의 경험이 많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힐러리는 언론이 오바마를 편애한다며 언론을 압박했다. 때마침 오바마에게 악재가 터졌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개정한다’는 오바마의 발언은 정치적인 수사에 불과하므로 캐나다 정부는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오바마 측근의 발언이 새나왔다.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한 부동산 개발업자와 오바마 간의 밀착 의혹도 불거졌다.
그러나 힐러리 진영의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벼랑 끝 승리에도 불구하고 실리는 작기 때문이다. 미니 수퍼 화요일 전 힐러리와 오바마 간의 대의원 확보 격차는 110명이었다. 이번에 힐러리가 3개 주에서 이겼지만 차이는 3명밖에 줄지 않았다(7일 현재 AP 집계치). 몇 주 전 힐러리가 텍사스·오아이오에서 20%포인트 이상 앞선 것을 감안하면 오바마는 두 개 주에서 피해를 최소화한 셈이다. 텍사스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는 힐러리가 이겼지만, 개표가 이달 말에야 완료되는 텍사스 코커스(당원대회)에서는 오바마가 56% 대 44%로 앞서고 있다.
승리의 기쁨을 반감시키는 일이 또 있다. 보수 논객인 러시 림보는 공화당 지지층에 “민주당의 분열을 즐기고, 오바마보다 쉬운 상대인 힐러리를 민주당 후보로 만들려면 텍사스에서 힐러리에게 투표하라”는 ‘지령’을 내린 바 있었다. 그 말대로 역선택에 나선 유권자들이 있었다.
정치가 ‘수학’이라면 힐러리는 오바마를 앞서기 어렵다. 뉴스위크와 뉴욕 타임스는 앞으로 남은 12개 주 경선에서 힐러리가 모조리 압승해도 대의원 수에서 오바마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도했다. 지금까지는 10%포인트 안에서 각 지역의 승부가 엇갈렸다. 앞으로 남은 경선은 작은 주에서 프라이머리 방식으로만 진행된다. 힐러리가 큰 주에 강한 반면 오바마는 작은 주와 코커스 방식에 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후보는 유·불리를 나눠 갖는 셈이다. 간단히 말해 지금의 격차가 큰 변화 없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정치가 ‘수학’이 아니라 ‘생물학’이라면 힐러리의 승리도 가능하다. 일부 언론은 “산술적인 계산을 잊어버리고 힐러리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돼야 매케인을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워싱턴 포스트의 여론조사 결과(5일)에 따르면 오바마와 힐러리 중 누가 나와도 매케인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바마는 12%포인트, 힐러리는 6%포인트를 각각 앞섰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행복한 고민 속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오바마와 힐러리는 천문학적인 선거자금을 모았으나 이 돈을 공화당과 매케인이 아니라 같은 편을 공격하는 데 쓰고 있다. 그런 가운데 매케인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지 아래 7일부터 자신의 이미지를 윈스턴 처칠에 맞추는 작업에 착수했다.
본선 후보를 정하지 못한 게 좋은 점도 있다. 민주당 소속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공화당과 차별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공화당 후보로 사실상 확정돼 앞으로 요식행위만 남은 매케인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힐러리와 오바마가 윈윈 게임을 한다면 민주당이 이번 대선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진흙탕 싸움을 한다면 매케인이 최후에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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