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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車의 제국’이 시동을 건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2호 34면

‘포르셰 제국’이 떠오르고 있다.

포르셰의 폴크스바겐 경영권 장악

지난주 독일 포르셰가 폴크스바겐 주식을 더 사들여 지분을 50%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유럽연합(EU) 공정거래 당국의 심사라는 절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세계 자동차 업계에 거성이 출현하는 것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제국은 아우디·람보르기니 등 최고 명차 브랜드를 앞세우고 중저가 브랜드와 세계적인 트럭 제조업체까지 아우르는 모습이다. 세계 자동차 시장은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국 업체들이 경영난으로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 유럽의 포르셰 제국과 일본 업계의 양대 산맥이 일합을 겨루는 양상을 보이게 됐다.

몸통 장악

2005년 말과 2007년 3월 포르셰는 유럽 최대 자동차회사인 폴크스바겐의 지분을 18.65%와 12.25%씩 사들였다. 전체 지분의 30.9%를 장악했다.

당시 이 지분이 포르셰 제국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독일의 ‘폴크스바겐법’이 20%를 초과한 지분의 의결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법은 ‘독일판 국민기업’인 폴크스바겐이 한 기업이나 자본가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23일 운명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EU 사법재판소가 폴크스바겐법을 불법이라고 판시했다. 우연인지, 포르셰의 막후 노력 덕분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운명의 여신은 포르셰의 손을 들어줬다. 포르셰는 기존 대주주인 로어 삭소니(지방정부)를 제치고 폴크스바겐의 1대 주주가 됐다.

포르셰는 기다렸다는 듯 지난주 큰 걸음을 내디뎠다. 187억4000만 달러를 투입해 폴크스바겐 지분 19%를 더 사들여 지분율을 50%까지 높이기로 한 것이다. 2년여에 걸친 계획적인 지분 매입의 결과였다. 포르셰의 최고경영자(CEO)인 벤델린 비데킹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혁신적인 자동차 동맹을 구성하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라미드 동맹

포르셰는 EU 공정거래 당국의 심사가 끝나는 대로 폴크스바겐의 지분 추가 매입을 끝낼 요량이다. 이미 당국과 사전 협의를 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 절차를 밟는 당국의 최종 결정은 몇 달 걸릴 것으로 보인다.

포르셰가 폴크스바겐 지분 50%를 장악하면 새로운 자동차 제국이 완성된다. 독일 아우디와 이탈리아 람보르기니·부가티, 영국 벤틀리, 체코 스코다, 스페인 세아트 등의 승용차 메이커를 이미 지배하고 있는 폴크스바겐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부가티는 일반 도로에서 달리는 차 가운데 가장 빠른 베이론(최고 시속 407㎞)을 생산한다. 벤틀리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 50주년을 맞아 구입한 스테이트 리무진을 제작했다.

폴크스바겐이 지분의 3분의 2를 갖고 있는 스웨덴의 세계적인 트럭 제조회사인 스카니아와 독일의 만AG 등 유럽의 양대 트럭회사도 포르셰의 품 안에 들어오게 된다. 폴크스바겐이 1990년대 후반 이후 유럽 자동차 업계의 인수합병(M&A) 전쟁에서 거둔 전리품을 포르셰가 고스란히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포르셰 제국은 남북으로 스칸디나비아에서 이탈리아 반도까지, 동서로 체코에서 영국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자동차 생산기지를 갖추게 된다. 또 중저가 브랜드 승용차와 부호와 매니어들이 즐겨 타는 최고급 승용차, 트럭과 버스를 함께 생산하는 종합 자동차 그룹의 면모를 자랑하게 된다.

배후 설계자

포르셰 제국은 폴크스바겐 이사회 의장인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작품이다. 포르셰 설립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셰의 외손자인 그는 포르셰의 2대 주주다. 스웨덴의 트럭 메이커인 스카니아의 회장도 지낸 유럽 자동차 업계의 팔방미인이다.

그는 설립자 가문이 CEO를 맡을 수 없다는 포르셰의 정관 때문에 일단 회사 밖에서 야망을 키워야 했다. 세계 명차를 한 지붕 아래 거느린다는 꿈을 안고 폴크스바겐으로 들어갔다. 폴크스바겐 CEO였던 1993~2002년 그는 공격적으로 이를 실현해 나갔다. 아우디·부가티·람보르기니·벤틀리 등을 인수했다.

최근 그는 폴크스바겐을 동원해 적대적 M&A 위기에 몰린 스카니아의 지분 3분의 2를 장악했다. 스카니아 경영진의 우군이 돼주겠다고 약속하며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다. 그의 자동차 제국 건설은 폴크스바겐 자금력을 동원해 제국의 기초를 다진 뒤 이 회사를 친정인 포르셰에 헌납하는 방식으로 주도면밀하게 진행된 셈이다.

주적은 도요타

“이제야 도요타와 견줘 볼 수 있겠다!”
지난주 포르셰가 폴크스바겐 지분을 더 사들이기로 결정한 직후 피에히는 이렇게 말했다.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동안 그는 도요타의 비약적인 성장에 위기감을 느껴왔다. 중저가 브랜드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 도요타가 90년대 렉서스를 내놓으며 프리미엄 브랜드로 거듭나자 아우디 등 유럽의 명차들이 흔들렸다. 스스로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자동차 설계자라고 자부하던 그의 자존심이 위협을 받았다.

평소 그는 도요타에 대항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명품 승용차를 소량으로 생산하는 유럽 방식으로는 도요타의 자본력 등을 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차를 대량으로 생산·판매하는 폴크스바겐을 지렛대로 삼아 아우디·람보르기니 등 명차 브랜드를 한 우산 아래 모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포르셰 제국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여 도요타의 공격에 대응하고 나설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세계 자동차 시장는 도요타와 포르셰가 생존을 건 승부를 펼치는 전장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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