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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를 탐험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 ①

중앙일보

입력

탐험가의 눈, 대서양을 노려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콜럼버스의 ‘달걀 세우기’ 일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타원형의 달걀을 탁자에 똑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웅성이고 있을 때, 콜럼버스가 유유히 다가와 달걀 밑 부분을 깨트려 균형을 잡아 보였다. 한동안 사람들은 이 일화를 두고 콜럼버스를 진취적이고 참신한 인물이라 평가했다. 미국에서는 해 마다 10월 10일이면 ‘콜럼버스기념일’이라 하여 정부 기관은 물론 주요 교통라인과 은행, 우체국까지 일손을 놓고 연휴를 즐겼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에게는 이 날이 가장 큰 축제일이었다.

물론 상황은 달라졌다. 미국의 진취적인 대학가에서는 콜럼버스 기념일을 ‘원주민의 날’로 지정하여 탐험가 혹은 발견자로서의 콜럼버스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략자로서의 콜럼버스를 성토한다. 대륙 발견의 기쁨이란 제국주의의 항로를 따라 부서지는 파도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탐험가의 행로를 뒤쫓을 때 당대의 역사적·사회적 배경과 조건을 휘발시킬 방법은 없다.

1500년대 지도

우선, 콜럼버스의 탐험정신을 부추긴 것은 절대적으로 돈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제노아의 상인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이해타산에 눈이 밝았다. 그러니 무역업이 한창일 때 그 중간에서 권력을 부리는 이슬람권 세력에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생각한 해결책은 ‘인도로 통하는 길을 개척하자’는 것. 지동설에 입각한 지리연구와 항해술을 연마하는 데 열심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매우 전환적이며 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신세계의 천체지도

하지만 여기에는 콜럼버스가 처한 절박한 상황, 혹은 유럽이 처한 절박한 상황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유럽인들이 흔히 주장하듯 그들의 진취적인 정복욕 덕에 열강 토대를 다졌기 보다는 그들의 절박한 상황에 힘입은 바 크다. 침략은 넉넉한 자들의 몫이 아니라 절박한 자들의 몫이다. 가령, 중세 말, 항해의 기초가 되는 천문학적 지식과 지리에 대한 시스템은 중국이 가장 막강했다. 무슬림족 역시 해양학이 발달하여 우수한 배와 해양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터였다. 중남미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역시 타인의 영역을 정복한다는 개념과 거리가 먼 문화 속에서 살았다. 반면 안정기에 들어선 이후에도 유럽은 12세기 이전의 혹한기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세계로의 탐험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자본과 에너지 개발 사업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비극적이기도 했다. 신세계를 발견해 더 큰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는 거창했으나 실제로 그들의 꿈은 선교를 핑계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짓밟고 그들의 자원을 수탈하는 방식으로 실현됐다. 실상 인도를 향했던 그의 탐험은 계획과 엄청나게 달라진 탓에 뜻하지 않게 인디언들의 수난을 주도하게 됐다는 것 역시 역사적 상식이다. 미국의 역사저널리스트 찰스 만에 의하면 콜럼버스에 의해 멸종된 인디언의 수는 당시 지구인구의 20%에 해당하는 1억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ColombusMap

제국주의의 꿈을 실현시켜준 탐험가의 여정은, 그러므로, 진공상태의 이상적인 발자취만을 남긴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이어질 우리의 탐험가에 대한 탐험은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둔 탐험가 뒤쫓기가 될 것이다.

자료 및 그림 /이 시 원
글 / 프리랜서 장 정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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