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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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욕실을 황황히 나와 화장대 앞에서 로션을 바르며 흠칫했다.
이렇게 반사적으로 남편을 피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능」에 대한 두려움.그 좌절의 고통이 미리부터 남편을 피하게 하는 것이다.그리고 그 회피의식이 남편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져 온 것은 아닌가.
깨달음이 여유로움을 낳았다.또 그 여유로움이 길례를 자유롭게했다. 길례는 달라져 있었다.
방안의 불을 모조리 끄고 머리맡의 작은 전등만 켜 뒀다.
어려서 친구와 같이 굴파기하던 일이 기억난다.
바닷가였다.
커다란 모래성을 쌓아 올리고 성의 이쪽과 저쪽에서 굴을 파나간다.팔꿈치만큼 파들어간 곳에서 어느 순간 친구의 손목을 잡는희열. 은밀한 관통의 유희였다.
친구의 손목을 잡는 긴장감 어린 재미에 길례는 잇따라 새 모래성을 쌓아 올리곤 했다.
친구의 손목은 부드럽고 단단했다.
굴속에서 잡고 누워 있으면 땅과 바다와 하늘이 온통 한 덩이가 되는 것같았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밀어닥치는 소리와 쓸려가는 소리가 포개어져 함께 들린다.
떠나가는 것과 다가오는 것.이것은 언제나 겹쳐서 나타나는 모양이다.친구 손목을 쥐며 그런 막연한 생각에 잠기기도 했었다.
아리영 아버지의 파도는 가고 남편의 파도가 밀려 오고 있다.
길례는 화려한 동백꽃 성 속에서 남편을 찾았다.
어린 날의 친구 손목이 기적처럼 거기에 있었다.이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남편의 진지하고 벅찬 표정이 길례의 가슴에 묻혔다.
유희라기엔 너무나 경건한 제의(祭儀)였다.길례는 지체 높은 여제사장(女祭司長)처럼 때로는 강력하게 또 때로는 자상하게 군림하며 시혜를 베풀었다.
실은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남녀의 존재구조인지도 모른다.원시모권(母權)시대의 남녀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원초에 여성은 태양이었고 남성은 달이었다.태양의 빛을 받아 달은 하늘 높이 돋아 오르면 되는 것이다.
그 힘의 균형이 무너진 후로 남녀관계는 타락해 왔다.여성은 마땅히 「제사장」이 돼야 하는 것이다.그래야만 남성의 모든 「불능」이 치유될 수 있다.
『사랑해.』 남편은 길례 귓전에 소리를 토했다.
황홀한 종지부였다.
이 종지부에서 모든 것이 새로 출발하게 될 것이다.갯벌에 닥친 파도 소리와 쓸려가는 파도 소리.아리영 아버지의 파도는 길례를 모래사장에 돋워 물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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