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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유산을찾아서>14.청자 辰砂彩연화문 표주박주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찰스 랭 프리어(1854~1919)는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센터 안에 있는 프리어미술관을 세운 장본인이다.그가 한국미술품에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韓美 수호조약 체결후 14년째가 되는1896년.이해 그는 일본 야마나카(山中)회사로 부터 한국도자기를 처음 구입했다.1919년 그가 타계할 때까지 도자기를 비롯해 청동제 유물.회화등 한국관련 예술품은 모두 4백70여점에이르렀다.
1896년 이후 프리어는 한국도자기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매료돼 본격적인 구입에 나섰다.1907년 야마나카회사로부터 50개의 조선시대 도자기를 구입했고,같은 해 구한말 궁정의로 활약했던 호레이스 뉴턴 앨런박사로부터 고려청자등 80여 개의 골동품을 당시 시가 3천달러에 구입했다.이처럼 한국도자기연구에 전력투구한 프리어는 1915년 희대의 물건(?)을 만나게 된다.
이미 한국도자기 구매자로 소문난 프리어에게 일본에서 한 손님이 찾아왔다.구로다 타쿠마라는 도쿄에 거주하는 골동상.그는 워싱턴까지 직접 프리어를 찾아와 한 물건을 내놓았다.바로 「청자진사채 연화문 표주박형 주전자」였다.당시까지 프리 어가 구입하고 구경한 고려도자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두 사람 모두 타계한 오늘,과연 얼마에 매매가 이루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기록을 남기기 좋아하는 미국인들조차 이에 대한 근거는 아무 것도 남기고 있지 않다.
청자에 진사채(辰砂彩:도자기에 酸化銅으로 문양을 그리고 환원번조하면 나타나는 붉은 색)를 사용한 것은 고려가 처음이다.
이는 고려 금속활자를 두고 세계최초의 발명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발명이다.중국이 청자를 처음 구워냈지만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을 탐했듯이 중국이 진사채를 도자기에 사용한 것은 고려보다 2세기 뒤인 14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결국 물건에도 임자가 있다는 말처럼 고려청자에 미친(?) 프리어에게 이런 걸작이 소개되고 구입하게 된 것도 인연의 끈끈한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묘하게도 이 청자와 비슷한 것이 국내에도 있다.국보 제133호로 지정된 호암미술관 소장품이 그것이다.형식과 양식이 거의 동일해 같은 시기,같은 작가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너무나 닮았다.호암미술관의 것은 1961년 강화도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한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충헌의 손자인 최항(崔沆.?~1257)의 무덤에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것이라고 한다.그런 탓에 적어도 최항이 죽기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돼 이 청자의 생산연도를 13 세기 전반기(1250년)로 잡고 있다.
이에 대해 정양모(鄭良謨)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보다 빠른 12세기로 잡고 있다.왜냐하면 이때가 청자의 전성기였고 또 상형도자기들(물체의 모양을 딴 자기)이 본격적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호암미술관 소장품에는 주전자의 뚜껑이 있지만 프리어의 경우에는 뚜껑이 없어졌다.프리어미술관의 루이스 코트 큐레이터는 구입당시 뚜껑이 있었지만 본래의 것이 아니어서 지금은 이용하지 않고 있다며 『제것이 아니면 오히려 없는 것만 못하 다』는 점에서 굳이 비슷한 뚜껑을 만들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제 이 청자의 아름다움을 살펴보자.절제된 진사채의 붉은 색이 주전자 전체를 마치 초파일 연등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그런가 하면 불교의 나라 고려 장인은 화사한 연꽃이 바로 연못(진흙)속에서 피어나며 그 연못은 생명의 신비를 머금 고 있음을 보여준다.
활짝 핀 연꽃이 아니라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순간과 그 연못 주위를 맴도는 개구리,그리고 연꽃 봉오리를 안고 있는동자승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를 안방에 펼쳐놓고 있다.아마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장인이라면 그는 분명 도(道 )의 세계를 체득한 장인임이 분명하다.예술과 도가 둘이 아닌 하나의 경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걸작이다.준수하고 날씬하다.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다.기술적으로도 진사와 퇴화(흰점 무늬)를 적절히 사용,미적 감각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흰색과 붉은 색의 조화,또 청자의비색이 서로 어우러져 신비감을 더해준다.손잡이와 수구(水口)의유연한 선이나 몸채가 풍만하면서도 비둔한 감을 주지 않는 것 등 완벽한 작품이다.』(정양모관장) 생각같아서는 이 청자가 한번쯤 고향나들이를 했으면 싶다.그러나 프리어미술관의 소장품은 창립자 프리어의 뜻에 따라 외국나들이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또 프리어미술관에서 다른 작품의 전시도 금지돼 있다.프리어의 유언인즉 『프리어 소장품을 감상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람객에게 해당작품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국땅을 맴도는 장인의숨결이 이 말을 어찌 생각할까.예술품에 대한 후손의 무지와 비극의 역사가 새삼 이 작품을 대할 때 떠오르는 것은 기자만의 회한이 었을까.
▧ 다음 회는 나전 국당초문 경함.
글 =崔濚周기자 사진=金周晩기자.프리어미술관제공 자문위원=鄭良謨 국립중앙박물관장 安輝濬 서울대박물관장 洪潤植 동국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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