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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미스’와 ‘영계’ 사이에 낀 그녀의 걱정

중앙일보

입력

중앙SUNDAY
지난해 말 애인도 없이 또 한 살을 먹게 됐다고 술잔에 코를 박던 후배 중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격렬하던지 나는 당장이라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 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선배, 그거 아세요? 요즘 30대 남자들은 연애할 시간도 없대요.”

자신의 여자친구와 남자친구를 소개팅 시켜 주었는데 여자친구가 볼멘소리를 하더란다. 자신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데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는 것. 전화도 자기가 먼저 하고 문자도 자기가 백 번 보내면 한 번 답을 받을까,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야 한다며 데이트 약속을 쉽게 못 잡고. “지금 간고등어 간 보는 중이냐고 남자친구에게 따져 물었죠. 그랬더니 ‘○○씨에게 호감은 있는데 정말 시간이 없는 걸 어떡해. 너무 바빠 극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금융권에서 일하는 30대 초반의 남자친구와 그의 동료들의 하루 일과를 들어보니 정말 불쌍하더란다.

여하튼 나의 후배가 흥분한 이유는 여자친구의 연애사나 남자친구의 불쌍한 인생이 아니었다. “남자들이 이렇게 바쁘다니 난 언제 남자 만나 연애해요.” 그녀의 걱정은 음모이론으로 발전했다. “남자는 자기보다 젊은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자기 또래의 여자들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나면 나이 어린 여자들과 얼마든지 연애할 수 있다 자신하면서 튕기는 거죠. 선배, 우린 ‘골드 미스’와 ‘영계’ 사이에 ‘낀 세대’라니까요.”

연애할 시간마저 없다는 남자들. 후배의 오버를 다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즘 30~40대 남자들에게 여유가 없음은 인정한다. 어떻게 아느냐고? 대화를 나눌 때 화젯거리의 심각한 빈곤 현상이 그 증거다. 그들과의 커피 타임 혹은 술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회사와 일, 그리고 TV 프로그램 ‘무한도전’과 ‘1박2일’이 전부다.

더 심한 경우는 군대에서 축구 했다는 얘기보다 더 지루한 ‘내가 옛날에~’로 시작하는 자체 제작 활극 스토리이거나, 서른 살 넘은 미혼여성의 증가현상은 ‘기가 센 지랄 맞은 성격을 사회가 받아주기 때문’이라는 식의 진부한 개탄이거나, 아내의 월급이 자신보다 많아 두렵다는 보수적인 농담이거나, 폭탄주 인생에서 터득한 무허가 처세술을 늘어놓는 거다. 인풋(in-put)이 없으니 아웃풋(out-put)도 없을 수밖에.

심각한 취업난과 오륙도사오정의 위험 속에서 남자들의 일에 대한 묵묵한 열정과 애환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물리적 시간’과 ‘심적 여유’는 단위가 다르다. 철학자 러셀은 자신의 논쟁적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무조건 ‘여가’를 가지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직업상의 일로 써버리지 않는 시간 중에서 1%만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투자해도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환희로 충만할 것인가라고.

여가를 즐긴다는 게 실상 큰일도 아니다. 일과 관계되지 않은, 그러나 관심을 끌어서 삶에 잔잔한 재미를 주는 그 무엇을 경험하는 행위다. 격렬한 근육의 움직임을 감지해 보는 운동, 지혜의 술 와인과 친구 되기, 산책과 문화를 동시에 향유하는 미술관 걷기, 인간의 독백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공연 관람, 세계 만국공통어인 맛있는 요리 배우기, 옷장 속 수트에 갈색 구두 매치해 보기, 사랑하는 여인에게 문자로 쏠 시 한 구절 찾기 등등.

그런데 슬슬 후배 걱정이 된다. 대한민국 남성 여러분, 정말 그런가요? 언제라도 맘만 먹으면 띠 동갑과도 연애할 수 있다고 자신하나요?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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