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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홍상수 감독 여덟 번째 영화 ‘밤과 낮’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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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것은 흡사 처음 등장할 당시 인상파의 그림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당대의 지배적인 화풍과도 다르고, 사물을 사진처럼 모사한 것도 아니지만, 독특한 사실감이 살아 있다. 예컨대 점묘법으로 그려진 인상파 회화가 햇살 속에 게슴츠레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본 경험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그의 영화는 실재하는 세계를 포착하는 또 다른 방식을 체험하게 한다.

그의 여덟 번째 영화 ‘밤과 낮’은 프랑스의 한국인 민박집에 하릴없이 머물게 된 남자의 일상을 일기체로 펼쳐보인다. 생전 처음 대마초 한 대를 피웠다가 경찰에 붙잡혀 갈까 두려워 도망치듯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 성남(김영호)이다. 체구만 듬직할 뿐 소심한 인간이다. 밤마다 서울의 아내(황수정)와 전화로 애정을 확인하다 지금의 처지가 서러워 꺽꺽 울기도 한다. 직업이 화가인 그는 민박집 주인(기주봉)의 호의로 미술 전공 유학생들과 알게 되고, 그중 유정(박은혜)에게 연심을 품는다. 이 바람피우는 유부남을 그저 ‘껄떡쇠’로 치부하기에는 또 다른 모순이 있다. 앞서 옛날 애인(김유진)을 우연히 파리에서 만났는데, 막상 호텔방에 들어가서는 샤워를 마친 그녀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주면서 ‘인내’를 강변했던 터다.

홍상수 감독이 직접 그린 도표. 왼쪽이 그가 지향하는 영화다.

‘밤과 낮’은 모순적인 인간들의 이야기다. 이제 와 돌아보면, 모순된 인간상이야말로 홍상수 영화의 중심축이었던 듯싶다. 성남만이 아니다. 겉보기에 야무지고 똑똑한 유학생 유정 역시 실은 다른 거짓을 품고 있다. 그녀를 꼴사나워하는 룸메이트(서민정)의 행태 역시 그 양면성이 꽤나 우스꽝스럽다. ‘밤과 낮’은 이 같은 모순의 조합이 어느새 무게중심의 균형을 잡아가고, 그래서 조화로운 세계를 구성한다. 김영호·박은혜를 비롯한 출연진의 연기 역시 맞춤하게 조화롭다.

최근 기자들과 만난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세계에 대한 도표(영화 ‘해변의 여인’에서 영화감독인 중호가 그랬듯)까지 그려가며 전례없이 친절한 설명을 들려줬다. 도표에 따르면 먼저, 피라미드꼴의 영화가 있다. 꼭짓점을 차지하는 영화의 핵심 주제나 컨셉트를 위해 하부의 디테일이 동원되는 방식이다. 일반 상업영화를 지칭한 것일 텐데, 꼭짓점을 장악하면 영화 전체를 제법 쉽게 포착할 수 있는 경우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와 달리 둥근 공 모양을 지향한다. 그 안에 대칭되는 여러가지 모순의 조합이 들어 있는 구(球)다. 피라미드식의 위계질서로, 즉 주제를 중심으로 영화의 전모를 옮기기 어려운 구조다.

물론 이 세계에는 큰 전제가 있다. 감독의 말을 빌리면 “통념의 허구성”이다. 그가 든 예를 옮겨 본다. “오래된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가 새로 만난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통념에 따르면) 이러면 안 된다며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스쳐가는 호기심일 수도, 인생을 바꿀 감정일 수도 있다. 그걸 확인하려면 통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밤과 낮’은 홍상수의 영화 중에도 또 다른 의미에서 둥근 편이다. 인간의 모순을 묘사하는 감독의 시선은 전에 비해 한결 덜 공격적이다. 한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겨졌던 적나라한, 그래서 추레한 베드신은 이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성남은 예술에 대한 생각을 가끔 들려주긴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년)의 대학교수 지망생들처럼 노골적인 속물은 아니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여느 상업영화라면 컷과 컷으로 잘라 붙일 법한 장면들을 ‘밤과 낮’은 카메라 앞에 사물을 당겼다가 밀었다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초점을 옮겨가며 연결해 보여준다. 빠른 속도감이 대세인 시대에 마치 여유로운 산보의 속도로 사물을 관찰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아마도 이전의 홍상수 영화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결말에 문제의 남자가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종의 구원이다. 성남은 임신했다는 아내의 거짓말에 놀라 황급히 짐을 꾸린다. 따지고 들면, 좀 불온한 구제책이다. 게다가 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불온한 꿈까지 꾼다. 어찌됐건, 아내의 품에 돌아온 상태다. 감독은 “구원의 과정도 합당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지만, 거짓말을 통해 이 남자가 구제되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고 거듭 말했다.

전혀 다른 유파가 주류인 시장에서 인상파를 강권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밤과 낮’은 희소한 화풍의 화가가 점점 원숙해져 가는 솜씨로 세상을 보는 또 다른 프레임을 제시하는 경우다. 사족으로 붙이자면, 영화 후반부에 굵직한 팔뚝의 성남이 북한 유학생(이선균)과 쪼잔한 팔씨름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꽤나 웃기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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