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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의 역사 칼럼] 딸들의 상속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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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39면

“올케 언니, 내 재산 내놔요.”

“그렇게는 못해요.”

조선 세종 23년(1441) 4월 죽은 감찰 이효근의 처 안씨는 오빠 안구경 집에 가 아버지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했다가 구타를 당하고 쫓겨났다. 아버지는 이미 8년 전 돌아가셨고, 또 근래에 오빠마저 죽은 상황이라 안씨는 더 이상 재산 분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올케 홍씨는 재산을 나눠 줄 의사가 없었다. 결국 안씨는 자신을 구타한 조카를 관에 고소했다. 그 조카는 장(杖) 80대에 처해졌고 안씨와 홍씨도 경기도에 유배됐다. 양쪽이 모두 벌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처벌은 그렇다 치고 과연 이들의 재산 분쟁은 어떻게 결론이 났을까? 안씨는 재산을 받을 수 있었을까? 후속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안씨는 나중에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았을 것이다. 이보다 20여 년 전(1418) 세종은 “혹 부모가 죽은 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한 가족이면서 노비와 재산을 모두 가지려는 욕심에서 혼인한 여자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꺼리는 자가 있으면 엄히 죄를 주도록 하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의 고유 관습이었고, 『경국대전』에는 구체적으로 그 비율이 명시되어 있다. 집안의 대를 이을 승중자(承重者)에게는 1과5분의 1, 즉 20%를 더 주고, 그 외는 아들이든 딸이든 무조건 1씩이었다. 첩의 자식이냐 적처(嫡妻)의 자식이냐의 구별은 있어도 아들딸 간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 조선의 상속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상속받은 재산을 여자들이 결혼한 뒤에도 자기 것으로 관리할 수 있었을까? 남편이나 시가의 재산과 섞여 버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양맹규가 어미의 노비와 전답을 제 맘대로 다루므로 그 어미가 고소장을 올렸는데, 이번에는 그 아들이 죄를 모면하고자 어미의 의사였던 것처럼 또 소장을 올렸으니…” 역시 세종실록(1443)의 기사다. 어머니가 아들을 상대로 소장을 낸 것이다. 모자간의 정리로 보아 심하다 싶을 만큼 어머니는 자신의 재산 지키기에 적극적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혼인한 여자가 자식 없이 죽었을 때 그 여자 재산은 친정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거의 부부 별산제(別産制)의 느낌이다.

조선은 왜 이렇게 딸에게도 똑같이 재산을 나눠 줬을까? 조선에서는 중기까지도 혼인해 남자가 여자 집을 왔다 갔다 하거나 아예 눌러 사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여자 집의 영향력이 컸다. 이런 영향력 유지를 위해 여자에게도 재산을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물론 조선 후기로 가면서 여자들의 상속분은 줄고 대부분 큰아들의 상속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우리나라 여자들은 꽤 오랫동안 자신의 재산을 관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며 역량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집에서 여자들이 통장 관리권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의미가 간단치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