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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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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자(强者)는 저항세력을 낳는다.이것은 강자의 숙명이다.
그 저항으로 인해 강자는 더욱 강해지고,저항세력은 물속 깊이침잠(沈潛),바닥의 영양을 흡수하다가 어느날 다시 물 위로 치솟는다. 삼국시대를 비롯한 우리의 오랜 역사가 이 대결의 구도를 보여준다.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닌 것같다.
남편이 강자로 군림했을 때 길례는 일마다 저항했다.군림과 저항의 결과는 서로의 패배였다.
그러나 남편이 강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지금,길례는 저항의 무기를 스스로 어처구니 없이 먼저 버리고 있다.부부관계란 「이치」는 아닌지도 모른다.
『아기를 빨리 데려오는 것이 좋겠어요.』 길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결정적인 갈림 구실을 하는지 길례는 알고있었다. 이 한마디는 자기성취를 향한 새 삶을 포기하는 일과 같다.이것은 또한 아리영 아버지와의 결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눈부시도록 감미한 유혹에 내내 눈감고 살 수 있을까.
길례는 화가도 아니고 화가 아닌 것도 아니다.주부 구실,아내구실에 있어서도 비슷하다.제대로 역할도 못한 채 명색은 주부요,아내다.
왜 이렇게 어중간한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 더욱 치열하게 살고 싶었다.
아리영 아버지는 그런 때 나타났다.
길례의 육신을 구석구석 눈뜨게 해주고,자신감을 심어주고,넓은세상이 있음을 보게해 주었다.그 「밝음」에 온통 등돌려야 하는것이다. 제주도의 꽃 개상사화(相思花)를 길러 본 적이 있다.
자잘한 실파같은 잎이 분수처럼 무더기로 솟아나는 것이 시원했다.성큼 돋은 꽃대 위에 맺히는 희고 봉곳한 꽃망울이 애처롭도록 정결해 더욱 좋았다.
이름에 「개」자가 붙은 야생화치고 강인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개상사화는 좀 다른 듯했다.
큼직한 화분에 옮겨 심어 물도 열심히 주고 비료도 이따금 주어 봤지만,잎줄기만 무성히 자랄뿐 꽃소식은 도무지 없었다.
『개상사화는 마구 다뤄야 합니다.길게 자란 잎일랑 쑹덩 잘라버리세요.물도 흙이 바짝 마를 때까지 주지 마시고,비료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하나 한가지 햇볕만은 충분히 쬐어줘야 합니다.
』 꽃가게 사람이 일러줘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건 숫제 「아내」와 같은 꽃이 아닌가.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약간의 모자람이 있더라도,남편의 따스함만 있으면 청순하게 피는 꽃.길례로 하여금 결단의 한마디를 하게 한 것도 남편의 의외로운 따스함이었을까.
한밤에 전화 소리가 울렸다.아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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