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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만 알면 뭐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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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25면

일본 모 기관의 초청으로 5개 도시 순회 강연회를 한 일이 있었다. 주최 측은 내게 최고의 동시통역사들을 붙여줬다. 한 분은 쾌활한 성격, 다른 분은 차분한 성격의 중년 여성이었다. 상대론적인 세계에 사니까 두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그런 조합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곁다리 책읽기

처음에 두 분과 만났을 때였다. 내 원고에 나오는 몇몇 의심스러운 단어에 대해 문의한 뒤 주로 쾌활한 성격의 여성분과 문학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말할 때마다 맞장구치는 바람에 꽤 우쭐했다.

첫 번째 강연은 좀 엉망이었다. 예상했던 바지만 기분이 안 좋았다. 동시통역도 엉망이었는지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가버렸다. 두 번째 강연은 오사카에서 열렸는데, 쾌활한 여성분이 내게 강연하다가 틈틈이 통역 부스도 봐 달라고 부탁했다. 왜냐고 물었다.

“표정이 어떤지 알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강연하다가 이따금 통역 부스를 봤다. 그런데 오호 놀라웠다. 거기에는 또 다른 내가 있었던 것이다. 통역사는 내 표정과 몸동작을 완벽하게 흉내 내면서 내 말을 일본어로 옮기고 있었다.

그걸 가리켜 ‘섀도잉(shadowing)’이라고 부른다는 걸 이번에 신자키 류코가 쓴 『그녀, 영어 동시통역사 되다』(길벗이지톡 펴냄)라는 책을 읽다가 알게 됐다. 섀도잉이란 지금 말하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훈련이다.

아마도 그 통역사가 내 표정과 몸동작을 완벽하게 흉내 낸 까닭도 머릿속에서는 내 말을 그대로 섀도잉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건 빙의(憑依) 같은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분도 내게 실제로 “말하는 동안에는 김연수씨가 되는 거랍니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국내에 저서가 다수 소개되는 요네하라 마리는 글 솜씨도 좋은 러시아어 전문 동시통역사다. 최근에 나온 『미녀냐 추녀냐』(마음산책 펴냄)에서 그녀는 통역이 언어학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통역사들이 옮기는 건 언어체계가 아니라 개념체계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체계를 이해하는 건 결국 한 사람의 시공간을 둘러싼 맥락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맥락을 모르는 언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1959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미국을 찾은 소련 공산당 총리 흐루쇼프는 “우리가 너희들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말해 환영 만찬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뜻은 “우리 체제가 너희 체제보다 오래간다”는 의미였다.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는 한 제 아무리 정확한 발음으로 말한다 해도 그게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 점에서 새 정권의 영어 정책은 선후관계가 잘못됐다.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해하는 교육을 먼저 해야만 한다. 얼마 전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전사들이 초등학생 250명을 인질로 붙잡고 있다는 뉴스가 세계 언론에 속보로 오를 때도 국내 신문사는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다른 나라 사정에 둔감한데, 과연 발음 교육을 강화한다고 우리가 그 사람들 얘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 귀를 여는 교육을 먼저 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그게 이해될 리 없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소설가 김연수씨가 격주로 책읽기를 통한 성찰의 시간을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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