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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만한 童心을 마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호 35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녹색 칠판 위에 누가 봐도 어린 아이가 그렸음을 알 수 있는 한 점의 그림이 포개져 있다. 그림 속 중앙에는 아담한 이층집이, 오른쪽 하늘에는 보라색 포도 모양의 열기구가 떠 있다. 반대편 하늘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파란색 구름이 자리 잡고 있다.

와인 라벨 이야기 ②

인상적인 것은 마당에 놓여 있는 구식 자동차. 다른 구석에는 이 그림의 주인공임을 암시하는 이름 ‘라이언(RYAN)’이 새겨져 있다. 이 천진난만한 풍경의 그림이 ‘에콜 41(L’Ecole No41)’의 와인 레이블이다.

에콜은 프랑스어로 학교란 뜻. 그림 속 건물이 학교이고, 이 학교가 있었던 거리가 41번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이 레이블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워싱턴 주로 와인 여행을 갔을 때였다. 처음 도착한 날 시애틀에서 머물게 됐는데 저녁 식사 후 이리저리 산책하다 들른 와인 가게에서 이 레이블을 처음 봤다.

1999년산 메를로 와인이었고 레이블이 마음에 들어 한 병을 사 그날 저녁 함께 갔던 동료들과 호텔에서 마신 것을 기억한다. 미국 와인이었지만 단맛이 강하지 않았고 풍성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탄닌, 그리고 적당한 산미가 느껴져 좋은 와인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컬럼비아 와인 엑스포에서 이 와인을 다시 만나게 됐고 와인 생산 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에콜이 생산되는 곳은 미국 나파에 이어 새로운 와인 전문 생산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워싱턴 주의 컬럼비아 밸리와 월라 월라 밸리다. 먼 옛날 인디언이 살았던 곳으로 그들의 언어가 지역명으로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

에콜 본사가 있는 월라 월라 밸리의 포도 재배 지역은 1880년대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많이 정착해 프렌치 타운으로 유명했다. 이민자들은 마을의 41번가에 학교를 세웠고 훗날 이들이 떠나고 남은 건물을 1983년 에콜 포도원으로 개조했다.

현재 에콜 와이너리의 오너는 딸과 사위다. MIT에서 공부하던 딸은 화학과 경영을 전공한 남편과 결혼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1989년부터 포도원을 맡게 됐다. 에콜의 레이블은 첫 와인을 출시하던 1984년 일가친척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림 대회를 열어 채택한 것이다. 100달러의 상금과 함께 우승을 차지한 소년은 여덟 살짜리 라이언 캠벨(Ryan Campbell). 이 그림의 원본은 에콜 와이너리에 보관돼 있으며, 꼬마 라이언은 현재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에콜 포도원은 월라 월라 계곡의 세븐 힐(Seven Hill) 지역에 포도밭을 갖고 있다. 1981년 조성된 포도밭의 규모는 81㏊가 조금 넘는다.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시라 그리고 세미용. 포도밭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지질학적으로는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네랄이 풍부하다.

한때 인디언의 전설로 가득하던 광활한 언덕이 이제 잠을 깨고 인간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받으며 아주 특별한 포도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와인 맛은 이미 어떤 수준을 넘어섰다. 젊은 포도밭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돋보이는 와인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20여 년 전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한 그루 포도밭을 심었던 부부. 그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아마도 무모함 내지 사물의 정수를 볼 수 있는 혜안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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