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황인숙의 주말 산책] 겨울 나그네를 위하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호 39면

대관령의 내일 최저 기온이 영하 29도가 되리라는 예보를 듣는 추운 밤이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눈만 남긴 채 목도리로 얼굴을 둘둘 감싸 매고 집을 나섰다. 꾸물거리다 보니 자정이 다 돼 간다. 쓰레기봉투와 비닐봉지를 한 손에 거머쥐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물병에서 더운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온다. 한결 따뜻하다.

교회 옆집 담장 밑, 쓰레기를 버려두는 곳에 쓰레기봉투를 내려놓는다. 스티로폼 상자들이니 페트병들이니 쓰레기봉투들이 끼리끼리 잔뜩 쌓여 있다. 한 옆의 좁다란 화단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화초들이 납작 엎드려 있다. 이 시간쯤에 폐지 뭉치나 빈 병을 걷으러 이곳을 들르는 듯한 할머니도 뵈지 않는다. 골목으로 접어드니 저만치서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그의 양손에 들린 쓰레기봉투를 보니 마음이 놓인다.

보안등 아래, 눈에 익은 흰색 SUV가 충직한 개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차장이 비어 있을 때도 저 차는 저기 세워져 있다. 어쩌면 차 주인이 이 연립주택에 사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차 세 대로 빼곡한 주차장의 입구, 오른쪽 벽에 너덧 개의 퍼런 모래부대가 만드는 작은 구석이 내 목적지다. 어스름 속에서 손을 더듬어 보니 고양이 밥그릇과 물그릇이 없다. 사료가 든 비닐봉지를 넓게 벌려 밥그릇 있던 자리에 놓았다. 물그릇으로 쓰는 구운 김 포장용기를 하나 갖고 와서 다행이다. 그동안 아무도 그릇을 치우지 않아 이 연립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다 인정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코팅돼 매끄러운 윤이 나던 그 갈색 종이곽은 초밥 포장용기였는데, 꽤 오래 써서 삼계탕 포장용기인 플라스틱 통으로 바꾼 게 어제였다. 그래서 더 눈에 띄었나. 언제고 이런 날이 오리라 각오했지만, 딴 때도 아니고 이렇게 추운 날 어떻게 그걸 치워버릴 생각이…. 그 마음을 생각하니 한기가 든다.

내가 여기 고양이 밥을 놓기 시작한 것은 지난 초가을, 어느 고양이를 만난 때부터다. 털이 부숭부숭한 흰색 고양이라서 눈에 유독 띄었는데, 처음부터 ‘애웅애웅’ 울면서 내 신발에 비비적거리고, 길바닥에 발라당 누워 뒹굴뒹굴 애교를 부렸다. 평소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전에는 본 적 없지만, 이 골목에서 태어나 살아왔을 것이다.

나이는 오륙 개월 돼 보이는데, 제 어미도 형제도 어디 가고 얘 혼자 남았을까? 어쩌면 누군가 키우다 버린 것일까? 한창 귀여울 새끼고양이 때 키우다 좀 크면 내다버리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종종 있다.

비교적 통통하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걸로 미루어 길에서 그렇게 험한 일은 당하지 않아온 것 같았다. 아마 길고양이로서는 드물게 흰색인 덕분일 것이다. 한 번은 환할 때 보니 꼬질꼬질 때가 타 거의 잿빛이었다. 밥은 뒷전으로 고개를 들이대기에 쓰다듬어주는데, 쉬지 않고 그렁그렁 소리를 냈다. 정이 그리운 모양이다. 한 오 분은 쓰다듬은 것 같다. 질리지도 않아 하는 애한테서 손을 거두고 돌아오는데, 한참을 쫓아오다가 한 무리 남학생들을 보고 차 밑에 숨었다. 그 새 걸음을 빨리 해 멀어지면서 손바닥을 보니 구두약을 바른 듯 새까맣게 반들거렸다.

어디 있니? 너무 춥지? 걔를 어떡해야 하나. 내가 사는 용산구가 자랑스럽게도 인도적인 유기 동물 관리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니 한 가닥 다행이지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