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워크홀릭(walkholic) 릴레이 인터뷰 (5) - 도보 장군 전용석

중앙일보

입력

로망roman을 꿈꾸다, 로망老望을 살다


WH 안녕하세요, 전용석 선생님! 도보인들 사이에서 장군님으로 통하시던데요, 실제로 군인이세요?
전용석(65세, 이하 전) - 나이가 너무 많아서 놀림 받는 것 같은데요?(웃음) 열심히 활동하는 도보인들 중 나이가 좀 드신 장군님이 있는데 그분 덕에 저 까지 장군님 소리 듣나봅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의 성도 ‘전’씨네요. 제가 소개해드릴 테니 진짜 장군님 한 번 만나보세요.(웃음) 저는 63세에 현업에서 물러났습니다. 25년간 광고 분야에서 일하다가 한 8년 자영업을 했고요. 인생의 황혼기를 어떻게 보내야 후회가 없을까 그런 것이나 고민하며 지내는 소시민일 뿐이에요.

WH 도보생활은 젊을 때부터 즐기셨는지요?
- 제가 젊었을 때는, 그러니까 우리 시대 가장들 사이에서는 ‘즐긴다’라는 표현을 쓸 만한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늦어도 서른 즈음에는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야 했고, 그 후로는 자식을 낳아 키우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가정의 생계와 행복을 책임져야 했어요. 그러니 저라고 별다를 게 없지요. 생활이 너무 바빠 딱히 취미생활이나 스포츠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되돌아보면, 뭐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은 이루지 못했지만 내 가족 모두 건강하고 특히 남들이 마냥 부러워하는 세 딸아이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세 아이 모두 처녀애들이라 요새는 자꾸 사윗감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웃음)

WH 걷기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요?
- 60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연령대가 바뀐 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꽤 의미심장한 사건인 모양입니다.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넘어가는 순간이 그러하듯 오십대에서 육십대가 되는 순간 역시 나름의 고충이 있답니다. 젊었을 때와 좀 다른 것은, 이젠 뭔가 좀 정리를 해야겠다는 기분이 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숲으로 들어가 걸으며, 또 다른 ‘정리의 출발’을 시작하자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매일 두세 시간씩 걷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되었답니다. 이제 이렇게 쓸쓸히 걷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겠구나 싶었는데, 웬걸요! 자연 속에서 느긋하게 걷는 행위는 내가 상상해왔던 그것과 또 다른 무언가가 있더군요. 바쁘게만 살아온 터라 정작 내 자신과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걷기를 통해 비로소 무력감을 치료했다고나 할까요? 컨디션이 좋은 날에, 땀이 맺힐 때까지 걸었을 때는 정신적으로 무척 만족감을 느낍니다. 날마다 자동차로 지나다녔던 한강이, 직접 걸어보니까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는데…. 24km를 걷는 내내 충격이었어요. 사실, 나는 땅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겁니다.
'서드 에이지 third-age'를 보람되게 보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이는 실로 감탄스러운 발견이었습니다. 덕분에 황혼기의 우울을 가볍게 건너뛰고, 좋은 책을 찾아 읽는 느긋함과 클래식을 즐겨듣는 평화로움을 몸에 익혔지요. 테마걷기 회원들과 함께 산행도 하고, 아내와 산사도 찾고, 계절이 바뀔 때면 가족들과 여행하고…. 60대에 하는 산책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었어요. 덕분에 가족들은 사랑과 화목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지요. 우리 가족은 일요일 아침이면 반드시 거실에 모여앉아 밥을 먹습니다. 주말 산책을 앞두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밥을 먹는다는 것, 그 이상의 행복을 바랄 필요가 있을까요?

WH 선생님의 ‘서드 에이지’ 단상이 인상적인데요, 이 시기를 잘 보내려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요?
- 평균적으로 칠십 년을 산다고 가정해 보죠. 참으로 끔찍하게 긴 세월입니다. 그런데 더 끔찍한 건 뭔 줄 아세요? 그나마도 건저 올릴 수 있는 장면이 얼마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무한 것이 인생이에요. 하지만 허망함에 무릎을 꿇고 무기력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년 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2년째 계속 기록하고 있어요.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며 내 자취를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아내와 함께 제3의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기초교육을 받듯이 그 시기에 맞는 교육과 고민을 다시 시작해야 돼요. 노년기의 방황은 사춘기의 그것만큼이나 고독하고 위험한 것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은퇴 후 큰 방황 없이 수순을 잘 밟아 온 것 같아요. 아내와 함께 좋은 강의를 들으러 다니며 캠퍼스를 누비는 즐거움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또 어느 날은 ‘장묘문화센터’를 방문해서 우리나라 화장시설의 포화상태를 실감하기도 했고요. 나의 장례방안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아내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화센터에서는 매장의 한계와 화장의 필요성을 설명했지만 저는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가끔 어머니 생각이 날 때, 묘소라도 찾아가고 싶은데 화장 후 어느 산속에 산골을 했기 때문에 찾아갈 곳이 없어서 쓸쓸했던 적이 많았거든요. 내가 경치 좋은 자연 속에 묻힌다면 내 아이들이 나중에 소풍 다니듯 즐겁게 찾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이 부분은 계속 고민이 돼요. 이 또한 저의 욕심일지도 모르지만요. (웃음)

WH 가족애가 넘치시니 도보활동도 가족들과 함께 하실 것 같은데요?
- 아이들과 함께하는 도보는 아무래도 주말이라야 가능하죠. 아내와는 매일 걷고 있습니다. 주로 집 근처의 중랑천, 초안산 등을 거니는데 마음이 동하면 좀 더 멀리 나가기도 하고요. 요새는 아내와 눈 구경 다니는 것이 즐겁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행’ 이라는 동호회에 참여했던 것이 제 짧은 도보인생 중 가장 인상적인 일입니다. 지난 해, 20여 차례 참가했는데 역시 여럿이 함께 걸으니 색다르더군요. 걷기 코스를 짜는 법과 효율적으로 걷는 방법 등 아주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이 기회에, 회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제가 항상 나이가 제일 많은데 용기 잃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덕분에 저만의 테마걷기 코스도 짤 수 있게 되었는데 올해는 전국을 걸어 볼 예정입니다. 젊은 사람들만 국토종단 하라는 법 있나요? 저는 제 나이에 맞게 구간을 여러 개로 나누어서 퍼즐 맞추듯 그렇게 조금씩 수행할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 계획은, 아내와 꼭 한번 세계 도보인들의 3대 로망의 길을 걸어볼 생각입니다. 그 첫째 길은 산티아고의 순례자의 길이고, 두 번째 길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길, 그리고 세 번째 길은 뉴질랜드의 밀포트 트랙의 에코 길이지요. 상상만 해도 흐뭇하네요.

WH 이 시대 젊은 도보인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나이를 먹으면서 제 스스로 다짐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충고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화하고 있고 충고의 기준점은 매번 바뀌기 마련입니다. 변화가 작았던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나이 먹은 것 하나만으로도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귀감이 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시각을 좀 더 달리해야 돼요. 서로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관계가 정립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젊은 도보인들에게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내가 젊었을 때에도 저토록 건강하고 싱싱한 모습이었을까 싶기도 하고…. 걷는 젊은이들이 너무 예뻐 보입니다. 아직 치기와 사치가 더 재밌을 나이인데도 김밥 한 줄에 생수 한 병 챙겨들고 길을 나서는 청년들을 보고 있으려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 보니 젊은 도보인들에게는 덧붙이 조언이 없네요. 다만 아직 걷기의 즐거움을 잘 모르는 청년들이 있다면 한 번 이 세계에 들어와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세계니까요.

WH 릴레이인터뷰 마지막 질문입니다. ‘걷기’란 과연 무엇일까요, 한번 정의해보시겠어요?
- 걷기란 단지 어느 방향으로 두발을 교체 진행하여 다가서는 움직임일 뿐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요. 저 역시도 어느 측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정의가 매번 달라지겠지요? 오늘은, 저의 걷기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걷기란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라고요.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