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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마을/눈] 아! 27평 아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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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면

 

“펑펑 자알 온다. 순아! 우리 소주 한잔하고 편의점 갈까?”

남편의 말에 아내가 웃음을 터뜨립니다. 남편도 웃습니다.

외환위기라는 폭풍은 가진 것 없는 젊은 부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친구 장가 밑천을 뺏다시피 빚을 얻고 딸아이 코 묻은 돈까지 긁어 전세방으로 이사하던 날입니다. 그날 따라 폭설이 내려 하루 종일 이삿짐을 놓고 씨름을 하였지요. 손바닥만 한 단칸방에서 부부는 온종일 짐을 옮기느라 녹초가 되었습니다.

늦은 밤 술 한잔을 권하며 길거리에 나앉지 않은 것을 자축했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소주병 뚜껑을 들더니 맨발로 뛰어나갔습니다. 얼떨결에 남편의 슬리퍼를 들고 따라나선 아내에게 남편이 소리쳤습니다

“야! 내 언젠가 이런 날 올 줄 알았다카이! 그러게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되는 기라. 27평 아파트가 뉘집 아 이름이가?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데이! 봐라 봐라 봐, 이기 뭔지 니 아나?”

남편이 꼭 쥐고 있던 소주병 뚜껑 안쪽에 숫자 ‘27’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주류업체에서 병 뚜껑에 1억원 상당의 27평 아파트 경품 행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남편은 다음 날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며 잰걸음으로 나섭니다. 양말도 못 신은 맨발에 눈보라 몰아치는 시골 밤 길. 족히 30분은 걸어가야 읍내 편의점입니다. 시리게 추운 날씨에도 부부의 가슴은 금방 터져 버릴 것처럼 뜨거웠습니다. “세금하고 등기비는 우짜노?” 찬바람에 빨개진 코를 감싸 쥐며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이고 걱정도 팔자다! 까짓 거 얼마 된다꼬! 방 전세 빼면 될 거 아이가” 잰걸음에 헉헉거리며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너무나 행복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편의점에 도착해 보니 병뚜껑마다 27, 26, 29, 31…. 숫자가 전부 다 있는 게 아닙니까. 남편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습니다. 남편은 엉뚱한 숫자를 보고 좋아했던 것입니다. 단숨에 달려간 길이었건만 돌아오는 길은 멀고 서글펐습니다. 터덜터덜 앞서 걷는 남편의 처진 어깨를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담배 서너 개비를 거푸 태우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뭐. 우리 복에 아파트는 무슨…. 고마 잊어뿔자이.”

잠깐의 욕심이 서로 부끄러워 부부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이후 먼 훗날. 부부는 열두 번째 이사를 했습니다. 중대형 아파트를 장만하였지요. 그동안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그날 밤처럼 펑펑 눈이 내립니다. 소주 한 병을 놓고 마주 앉았습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최미순·45·주부·경기도 용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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