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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힘세진 외국자본…커지는 국적성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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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이러다간 국내 주요 기업과 금융시장이 외국자본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 아닌가."

은행들이 잇따라 외국인 소유로 넘어가고 SK㈜ 같은 기업은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을 받으면서, 이런 우려의 목소리가 부쩍 커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자본 유치에 발벗고 나섰던 정부도 최근 미묘하게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시장은 철부지들의 놀이터가 아니다"고 말했다. 시장은 이를 다분히 외국자본을 의식한 발언으로 해석했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도 "외국자본의 자격심사를 강화해 국내외 자본의 균형 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외국자본을 모두 한통속으로 보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감정적인 외국자본 배척론은 자칫 감당하기 힘든 역풍만 불러올 것이란 지적이다.

◇고개 드는 외국자본 견제론=이제는 외국자본을 균형잡힌 감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때가 됐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는 "그동안 국내에서 자본의 국적성을 거론하는 게 금기시됐지만, 분명 국적은 자본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대기업들은 세계 전역을 사업 무대로 하지만, 여전히 경영전략과 연구개발(R&D), 디자인 개발과 브랜드 관리 등 부가가치가 높은 핵심 기능은 대부분 본국에서 수행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張교수는 "이 때문에 스웨덴.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은 은행.에너지 등 국가 기간산업에 대해선 경영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차등주식제도(의결권에서 내국인 우대) 등을 광범하게 도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찬근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는 "국내자본과 외국자본은 누가 적극적으로 나서 고부가가치형 산업을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 李교수는 "국내자본은 국내 투자환경에 익숙하고 이를 개선할 정치적.사회적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나라를 일차적 투자 대상지로 삼기 마련"이라며 "국내자본이 고부가가치 투자에 적극 나서면 외국자본이 더 활발히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미국의 자동차 자본은 독일에 들어가선 연구개발 활동을 병행했지만, 브라질에선 단순 조립판매에만 치중했다. 이는 독일의 자동차기업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박현주 미래에셋회장은 "국내증시에서 차지하는 외국인의 비중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머지않아 국내 자본의 주권이 위태로울 상황"이라며 "토종자본의 육성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감정적 대응은 금물"=외국자본의 순기능이 여전히 크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연강흠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의 기업지배구조가 이만큼 개선된 것도 따지고 보면 외국인들이 시장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며 "국내 기업들이 여론이나 노조의 반발 등으로 인해 선뜻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외국자본은 과감하게 돌파하곤 한다"고 말했다.

매킨지컨설팅의 한 관계자는 "경제여건이 좋아졌다고 외국자본을 무조건 배척하는 분위기까지 일고 있다"며 "이러다간 외국자본이 일시에 등을 돌릴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원 수석연구원은 "외국자본을 부정하는 국민정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국내자본이 외국자본에 역차별당하는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자본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며, 주가차익만 노리는 단기자본과 한국시장에 뿌리내려 장사를 하려는 장기자본은 구분해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재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그동안 공적자금을 투입한 은행들이 잇따라 외국자본에 넘어갔지만 선진금융기법의 도입은 기대에 못 미쳤다"면서 "이는 정부가 은행지분을 금융회사(장기 자본)에만 넘길 수 있는 규정을 훼손하며 단기 투자펀드에 손쉽게 넘겼던 결과"라고 지적했다. 李연구위원은 "뒤늦게나마 투자펀드를 대신해 미국 씨티은행이 한미은행을 인수한 것은 다행"이라며 "장기자본은 국내에서 장사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만큼 시장의 '책임성'이란 측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호주 매쿼리금융그룹의 존 워커 한국대표는 "한국 정부는 이제 단기 투기성 자금과 장기 사업성 자금을 구분해 접근하는 정책적 노력이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김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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