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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 안 났어도 1000년 이상 갔을 텐데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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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무형문화재 대목장(大木匠)과 문화재위원들은 화마에 휩싸인 숭례문 화재 현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평생을 문화재 복원에 매달려 온 고건축 분야 전문가인 이들의 가슴은 숭례문과 함께 까맣게 타들어가 잿더미가 됐다.

신응수(66·사진) 대목장은 1960년대 숭례문 해체·보수 작업에 도편수 고(故) 조원재옹의 제자로 참여했다. 세월이 흘러 당시 스승의 나이가 됐다. 그는 현재 광화문·경복궁 복원을 총괄하는 도편수를 맡고 있다.

신씨는 11일 문화재청 관계자들과 숭례문 복원을 위한 장시간의 대책회의를 마친 뒤 현장을 찾았다. 그는 “당황스럽고 안타까울 뿐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며 비통함을 숨기지 않았다. 전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옛날 자재를 최대한 살려 중수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 건축물로서 숭례문만큼 잘 보전된 것이 없다”고 했던 그다. 그러면서 “화재만 아니었어도 1000년 이상 갈 중요한 문화재인데 소실돼 안타깝다”고 심경을 토로했었다.

최기영(63·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장) 대목장도 “불에 그을린 목재는 휘어지면 다시 원형대로 복구하기가 어렵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숭례문 복원 대책회의에는 두 대목장 외에 윤홍로(명지대 겸임교수) 건축문화재분과위원, 손영식(전통건축연구소장) 사적분과위원, 김동현(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건축문화재분과위원 등이 참석했다. 이 중 윤 위원은 40여 년간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등 국내외 고건축 문화재를 발굴·복원해 온 전문가다. 다음은 윤 위원과의 일문일답.

-과거 숭례문 중수 작업을 할 때 방재 시설은 설치하지 않았나.

“문화재는 원래 상태대로 복구하는 게 제일 좋다. 60년대에는 기둥이나 서까래가 썩거나 부서지면 수리하는 게 전부였다. 80년대가 돼서야 방충·방염 시설을 했다. 그러나 초기 진화용일 뿐이다. 불이 커지면 목재가 견디지 못한다.”

-숭례문에 스프링클러도 없었다는데.

“스프링클러가 가동되면 단청이나 목재가 변질될 수 있다. 고건축에 함부로 실험을 할 수 있겠나. 고민하다 실용성이 없다고 판단해 설치하지 않았다.”

-숭례문 안에 중요한 자재들은 없었나.

“수년 전에 대들보 등 오래된 자재를 부여의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옮겨 놔 그나마 다행이다.”

-복원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나.

“타지 않은 1층 역시 물에 젖고 목재가 약간씩 비틀린 상태다. 1층까지 해체해 복원해야 한다. 타다 남은 단청은 말려서 가능한 한 살리겠다.”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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