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배우 박정자씨 ‘19 그리고 80’ 뮤지컬에 도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회색 코트 안에 진한 남색 셔츠를 입고 그녀가 나타났다. 노란 갈색 퍼머 머리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공연 중인 뮤지컬 ‘19 그리고 80’의 극중 배역 ‘모드’에 맞춰 염색한 것이다. 연극배우 박정자(66·사진)씨다.

화사하게 웃는 모습은 천상 ‘모드’다. ‘19 그리고 80’의 모드는, 적어도 한국에선 박정자와 동일어다. 2003년 처음 모드를 연기한 이래, 거르지 않고 공연에 참여해왔다. 올해는 뮤지컬로 첫 선을 보였다. “박정자 너마저도 뮤지컬이냐 하는 소리도 듣지만, 관객은 항상 변화를 바라잖아요. 배우는 거기 맞춰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예술한다는 생각, 나 진작에 떨쳤어요.”

고정 레퍼토리를 갖는 배우가 흔치 않은 현실에서, ‘모드=박정자’란 브랜드는 본인 말대로 “대단한 축복”이다. 축복은 예순 셋에 왔다. ‘19 그리고 80’을 처음 하면서 ‘꿈이란 게 60 넘어서도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단다.

“그전까지 예순 넷에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딱 그 나이면 더 이상 밉지도 늙지도 않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이젠 모드 나이가 될 때까지 이 극을 하겠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뮤지컬로든 연극으로든 2년에 한번씩 할 생각이에요. 그럼 이번을 포함해서, 음, 일곱 번 남았네요.”

20대 때부터 노역 연기를 해온 그녀에게 80이란 나이는 낯설지 않다. 달라진 것은 배역과 실제 나이의 간극이 좁혀지고 있다는 것. 지난 공연 때까지 관객의 탄성을 자아내던 극중 물구나무 서기도 이제 힘에 부친다. 그래도 나이 드는 게 서럽진 않다.

“연극엔 인간의 모순과 갈등이 녹아 있고, 연기는 나이를 먹었을 때 자연스럽게 와요. 이제 생길 것은 주름 밖에 없지만, 감사해요. 시간이 주는 선물이자 역할을 통해 얻은 훈장이니까요.”

뮤지컬 현실에 대한 얘기로 접어들자 박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극장은 많아도 뮤지컬 할 만한 곳은 많지 않아요. 무대장치니 오디오 시스템이니 기술적인 면이 너-무 떨어져요. 그래도 배우들을 보면 참- 열심히 해요. 참- 예뻐요. 일찌감-치 나와서 몸 풀고 발성 연습하는 걸 보니 거.기.에. 뮤지컬의 미래가 있다 싶어요.”

마치 대사를 읊듯, 강조하는 대목에선 장음과 스타카토를 섞었다. 손짓도 힘찼다. “대관 문제로 극장 리허설을 이틀 밖에 못 했어요. (눈썹을 찌푸리며) 이-런 연-습은 있을 수가 없어. 이렇다니, 아-직-도!”

이것은 한편의 모노드라마다. 박정자가 연기하는 ‘모노드라마 박정자’. 리드미컬한 말투, 살짝 청중을 흘기는 듯한 눈빛, 때로 소녀처럼 발그레 미소 짓고 때로 여장부처럼 박장대소하는 저 웃음. 호흡은 가팔라졌고, 손짓은 격렬해졌다. 박정자에 빠진 박씨는 열정적으로 ‘대사’를 쏟아냈다.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 많죠. 예컨대, 음, 시카고? 거기서 마마 역. 올해 다시 한다는데 나, 하고 싶어. 또 빌리 엘리어트. 영화로 잘- 봤거든요. 뮤지컬이 지금 런던에서 인기 많다는데, 그 할머니 역을 꼭 하고 싶어요. 그래서 (한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소문 내고 있어요. 그렇게 최면을 거는 거지. 아이, 그럼 탭 댄스를 춰야 하는데, 나 배울 수 있을까? 호호.”

글=강혜란 중앙선데이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박정자=공식 이력은 1963년 동아방송 전속 성우로 입사하면서 시작된다. 본격적인 배우 활동은 66년 극단 ‘자유’의 창립 멤버로 합류하면서부터. 이병복 대표의 깃발 아래 김정옥 연출과 나옥주·김용림·윤소정·최불암·김혜자 등 기라성 같은 연기자들이 뭉친 ‘자유’는 연극배우 박정자를 키운 요람이자 우주다. 86년 임영웅씨가 연출한 ‘위기의 여자’에서 박씨는 강인한 카리스마로 요약되던 기존 캐릭터에서 180도 변신, 흔들리는 중년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