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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을찾아서>"그리고 아무말도 하지않았다"김영현 창작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80년대민족문학의 기수로 주목받았던 김영현씨가 5년만에 새로운소설세계를 예고하는 창작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창작과 비평사刊)를 냈다.
김씨는 84년 등단 이후 80년대 내내 권력의 야만적 폭력에저항하고 억압받는 약자들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탐색해 왔다.첫창작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90년)는 그같은 작업의 결산. 이번 창작집에 집약된 그후 5년간의 작업은 90년대의 변화된 현실을 담아내려는 방황과 모색의 여정으로 점철된다.가장 최근작인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94년 실천문학 여름호)는 이같은 방황의 뿌리와 탐색의 목적지를 함축적으 로 보여준다. 민중화가인 재섭이 외동딸의 죽음과 아내의 가출로 인한정신적 파탄지경에서 강원도 태백의 수도원에 벽화를 그리러 가면서 소설은 시작된다.「노동이 기도요,기도가 노동이다」는 믿음을갖고 있는 그 수도원에서 재섭은 자신의 자의식을 투영 한 그림을 그린다.고뇌에 찬 인간의 얼굴을 하고 동터 오는 새벽의 여명을 응시하는 광야의 예수상이 그것이다.
예수상으로 드러난 재섭은 보편적인 가치가 사라진 현실과 보편가치의 필요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다.이 고민은 김씨의 글쓰기가 갖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불꽃에는 뿌리가 없지만 저 풀꽃들에겐 뿌리가 있잖아요.불꽃은 그저 정처 없는 분노일 뿐이거든요.이제 우리가 그 불꽃에다뿌리를 달아주지 않으면 안돼요.』(해남가는길) 김씨는 스스로 「불의 터널」이라고 표현한 80년대의 공허함을 반성한다.동시에90년대에 대해서도 『이성의 역할이 과장됐던 80년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성 자체가 부정되다시피 하는 혼돈의 시기』로 회의한다.그의 소설은 이 지점에서 상처받은 이성의 한계를 정하고 거기에 맞게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김씨는 그 작업의 어려움을 재섭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털어 놓고 있다.
『새벽의 하늘빛을 표현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자칫하면 늦은 저녁 하늘과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80년대새벽의 하늘빛을 너무 짙게 칠했기 때문에 이제 어떠한 색깔을 다시 칠해도 바탕색 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김씨는 80년대 칠했던 새벽의 하늘빛을 지우는 작업에 몰두한다.그래서 이번 작품집에서는 소박한 민중적 영웅이었던 차력 사를 소재로 한 「차력사」등에서 잘 드러나듯 관념적인 민중에서 구체적인 이웃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좀도둑에서부터 정치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려볼 생각입니다.구체적인 삶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그속에서 설득력 있는 「새벽의 하늘빛」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김씨의 소설이 어떤 세계를 보여줄지아직은 불투명하다.그러나 80년대의 꿈과 90년대의 현실을 껴안으려는 김씨의 힘겨운 노력은 문학이 포용해야할 영역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김씨는 『그리고…』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영구불변한 진리란 없을지 모른다.그러나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안 우리의 삶을 걸 만한 진리는 있을 것이다.나는 이 말을 이 시대에 활개치는 진리의 상대주의자들.
해체주의자들.허무주의자들. 다원주의자들 그리고 그럴듯한 교설로분식한 신비주의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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