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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 '미로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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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은숙(1962~) '미로에서' 부분

전철 파업이 시작된 날 출근길 버스에 오른다. (중략)

광화문 정거장이다. 한 사내가 호떡을 들고 급히 올라탄다. 사람들이 그를 밀친다. 호떡이 제 옷에 닿을까봐 표정을 구긴다. 운전사가 백미러로 그를 바라본다. 차비. 그는 차비를 내지 않았다. 운전사와 사내 사이의 긴장감이 승객들을 일순 숨멎게 한다. 차비. 사내는 개의치 않는다. 승객들은 필경 사내의 아침식사일 호떡 먹기를 지켜본다. 운전사의 외침이 있고 나자, 없습니다. 분명히 발화된 그 말은 없습니다라고. 운전사는 당황해한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돌 하나 튕겨 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도 그 말 하고 싶었다. 없습니다, 아무것도. (후략)


오래 전 나도 무임승차를 많이 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자유롭고 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 버스에 탔다. 토큰함 대신 버스 안내양이 서 있던 시절. 안내양들은 가난한 문학청년의 무임승차를 늘 관대히 봐주곤 했다…. 붐비는 버스 안에서 호떡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사내. 그는 왜 호떡을 들고 버스에 올랐을까. 어차피 차비가 없다면 식사를 끝낸 다음 버스에 오르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가 세상의 다른 일에도 저렇듯 당당히 답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없습니다…. 그의 말을 묵묵히 듣는 우리에겐 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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