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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務實力行 가르침 오늘날 되살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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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 없어라.'

일제와 맞서 민족의 큰 지도자로 활동하신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가르침이다.

봄비가 소리없이 옷깃을 적시던 지난달 21일, 도산의 조카딸로 선생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평생을 바친 안성결(安聖潔.92) 할머니를 뵙기 위해 서울 성북구 정릉의 탄포리교회로 향했다.

3.1절을 맞아 도산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과 생전의 활동 모습을 조카딸의 입으로 전해듣고 싶었다.

할머니께선 아흔이 넘은 노구에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데도 길목까지 나를 마중해 교회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 벽면 곳곳엔 1920~30년 당시 도산 선생께서 활약하시던 모습이 흑백사진으로 남아 역사의 현장을 증명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할머니께선 무실역행(務實力行 .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과 충의용감 등 도산의 애국정신과 활동상을 토해냈다.

3.1 독립운동 당시 도산은 상하이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 일본엔 눈엣가시였다.

그 때문에 할머니 집안은 끼니마저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일제에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어린 안성결에게도 도산의 거처를 대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 요인들을 폭살하는 의거를 일으키자 일본은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 도산도 체포됐으며, 서울로 압송돼 옥고를 치르다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한다.

감옥에서 나온 도산은 지방을 돌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을 한다.

그러나 옥살이를 하며 상한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평남 대보산의 송태산장에 은거한다.

이 무렵부터 안성결은 도산을 곁에서 모시게 된다. 전국 각지에서 조선의 청년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산장으로 몰려들었다. 선생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웠다.

그러나 일제는 도산 선생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37년 6월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의 지회 결성 사건을 빌미로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가둔 것이다.

그해 12월 건강이 나빠져 석방되긴 했지만 이듬해 3월 10일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도산은 눈을 감았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할머니는 공산당이 싫어 생명처럼 지키던 도산 선생의 산장과 유품을 뒤로 하고 1.4 후퇴 때 남쪽으로 넘어왔다.

그 후 다시는 송태산장에 갈 수 없었지만 서울에서 홀로 살며 도산의 유지를 받들고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헌신했다.

66년엔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아 정릉에 도산중학교를 세웠으며, 89년부터는 탄포리교회를 설립해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할머니는 나라의 지도자들과 국민의 애국심이 없고 정직하지 못한 현실 세태를 크게 꾸짖었다. 오직 개인과 파벌의 이익만 좇다 보니 나라가 어지러우며 신용 불량자가 속출한다는 것이다.

도산 선생의 애국정신에 대한 가르침을 마치자 할머니는 훌쩍 자리를 뜨셨다. 문 밖에는 봄을 재촉하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소정 학생기자(서울 창문여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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