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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백담사 만해마을에 다녀와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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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러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보조금을 일부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문화예술위원회가 요즘 쥐어터지고 있다. 이를 두드려 패는 쪽은 영화진흥위원회와 학술진흥재단까지 싸잡아 ‘좌파 문화권력’으로 몰아붙인다. 지난 10년간 정권이 좌파 문화예술인들을 앞세워 체제를 부정하고, 예술을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친북·반미 선동을 꾀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는 게 주장의 요지다.

이런! 나는 환한 대낮에 심봉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히 한국판 매카시즘의 새로운 점화다. 심지어 지난 정부의 문화예술 관계 기관에서 일한 분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거명하며 좌파의 싹을 자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평생 창작활동에 애써온 귀한 이름들이 이데올로기 번식을 위한 제물로 쓰이고 있다. 명예훼손 운운하는 케케묵은 문장을 쓰기조차 민망하다. 드디어 문화의 공안정국이 도래한 듯하다. 비판론자들은 과격하다. 겉으로는 문화의 다양성을 말하면서 ‘타락’ ‘선동’ ‘색출’ ‘진상조사’ ‘점령군’과 같은 용어를 서슴없이 동원한다. 펜 한 자루 쥐고 살아온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현실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한풀이 치고는 너무 섬뜩한 분위기 조성이 아닌가? 정말 이래도 되나?

이른바 ‘좌파 문화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이나 단체들은 하나같이 예산 집행의 편파성과 불균형을 근거로 내세운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정작 ‘돈’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차기 정부에서 새로운 문화권력으로 부상하고 싶다는 의지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행위로 읽힐 뿐이다. 좌파 척결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내세우는 전략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듯하다. 한국전쟁 직후의 문화예술계가 이랬을까? 문화대혁명의 폭풍이 중국 대륙을 거세시킬 때 과연 이랬을까?

착각하지 말자. 문화권력의 헤게모니를 쥔 자들이 문화를 만드는 게 아니다. 한 시대 문화의 주도권은 훌륭한 작품이 만든다. 작품의 생산자인 작가와 작품을 향수하는 국민이 그 나라의 문화를 만든다. 좌파의 문화는 좌파라서 형편없고, 우파의 문화는 우파라서 우수한 게 아니다. 작품은 좌우를 따지지 않는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문화의 미래란 없다. 하도 답답해서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좌파든 우파든 상상력으로 승부를 하면 어떨까? 상상력이란 걸 표준도량형으로 계량할 수 없다면 문화 향유자들의 판단에 맡겨 좌우 어느 쪽이 감동을 주는지 재보자는 것이다. 영화를 개봉할 때는 감독의 이념 성향을 포스터에 적고, 누가 더 많은 관객을 모으는지 시험해 보면 어떨까? 문학이나 출판도 마찬가지다. 책을 출간하기 전에 표지에다 작가가 좌파인지 우파인지 표시하고, 어느 쪽 작가가 예술성과 대중성을 더 깊게 갖추었는지 독자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나는 좌파의 줄에 서겠다. 나는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고, 민예총 회원이며,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므로! 웃자는 이야기다. 그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공간으로 문화를 활용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므로.

만해마을에 머무를 때, 두 차례나 폭설이 내린 적 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데, 문득 어떤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강원도 인제는 휴전선에서 가까운 곳. 그 너머로 이어진 하늘도 눈을 쏟아 붓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북에 사는 이들도 똑같은 눈을 맞고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만 마음이 싸해지는 것이었다. 역시 좌파적 상상력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인가? 내가 만해마을에서 밥 좀 얻어먹었다고 이러는 거 아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