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징검다리 놓은 6자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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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예상대로의 전개였다. 북한이든 미국이든 둘 다 판을 깨고 싶지 않았다. 올 11월의 미 대통령선거가 공교롭게도 제2차 6자회담의 분위기를 좌우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는 이라크전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대통령선거전에서 고전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또 다른 위기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의 유력 후보들은 부시의 대북정책을 비난하고 있다. 북한은 미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다면 기회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선거까지 그럭저럭 버티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한다. 북한과 미국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결국 이번 회담은 구체적 합의는 없지만 희망을 깨지 않을 정도의 합의가 마련됐다.

2차 6자회담은 미흡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징검다리로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었다. 가장 큰 의의는 6자회담이 북핵 해결의 메커니즘으로 제도화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6월 말까지 3차 회담을 하기로 합의했으며, 특히 구체적 세부 사안을 다루기 위한 실무 차원의 협의체가 마련됐다.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의 틀은 정비된 셈이다. 이제 6자회담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문턱에 서 있게 됐다.

둘째로, 한국 외교의 가능성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보상해야 동결할 수 있다는 북한과 모든 핵을 폐기해야 보상할 수 있다는 미국의 입장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교착국면을 움직이게 한 윤활유 역할을 한국이 한 점은 매우 신선했다. 핵 폐기를 전제로 동결할 경우 에너지를 지원할 수 있다는 한국의 3단계안은 6자회담의 교착국면을 타개하고 북핵 해결의 중요한 방향성을 제공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번 회담은 성과보다 문제점을 찾는 것이 쉬울지 모른다. 우선 핵심사안에 대한 해결 없이 문제를 실무회담으로 넘겼다. 핵 문제 해결의 정의와 범위에 대한 구체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실무협의 채널은 공전할 수밖에 없다. 비록 외교 경로를 통해 실무채널의 임무를 정한다고는 하지만, 문제 해결의 방향성과 지침에 합의가 없는 가운데 실무협상이 개최된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과거 4자회담의 경우 핵심 사안에 대한 합의가 어렵자 분과위원회들을 구성하는 외형만의 진전을 추진하다 결국 실패한 바 있다. 실무채널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방향성이 외교 경로에서든 6자회담에서든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한편 북한은 우라늄 농축(HEU) 프로그램에 대해 철저히 부인했다. 북한이 HEU 계획에 대해 시인했더라면 북핵 문제는 동결과 보상이라는 구도 아래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HEU가 포함되지 않은 동결과 폐기는 무의미하다.

현재 가장 우려되는 점은 북한 태도의 경화다. 회담이 정해질 무렵만 해도, 북한은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북한은 최근까지 "평화적 핵동력 공업까지 멈춰 세우는 동결조치를 제안한 것은 또 하나의 대담한 양보가 아닐 수 없다"고 거듭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회담에서 그 대상을 핵무기 프로그램으로 후퇴시켰다. 더욱이 얼마 전 납치 일본인 가족의 송환을 시사해 기대를 갖고 방북한 일본 대표단에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북한의 태도 경화는 미국의 대선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북한의 입장이 갑자기 경화된 시점은 공교롭게도 탄탄대로를 걷던 부시의 지지율이 급락한 시점과 일치한다.

북한은 미 대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4년 전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교훈이다. 얻으려는 것을 극대화하려다 조명록 차수를 불과 대선 3개월 전에 워싱턴에 보냈다. 일찍 보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핵 포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부시가 재선되면 모든 것이 낭패다. 더욱이 민주당이 집권한다 하더라도 9.11테러를 겪은 미국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추구할 것이다. 재처리를 했어도 무시하는 부시 정권에 비해 군사력 사용을 심각히 고려한 것이 민주당의 클린턴 정권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