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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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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적 인물 중 한국민에게 가장 알려진 사람 중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 히로부미(좌)와 안중근 의사 의거 직후(우)

1905년 11월 17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등 을사5적을 내세워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노골화하고,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시조약을 체결한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국내외 외국 공사관과 해외의 우리나라 공사관이 폐쇄해야 했고, 통감부를 통해 내정까지 지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오늘(3월2일)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으로 취임했다.

우리에게 영원히 침략자이자 민족의 원수로 낙인찍힌 이토 히로부미는 그러나 일본 국민들에게는 합리적이고 청렴한 정치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난 2000년 일본 아사히 신문이 실시한 '지난 1천년 일본의 정치지도자중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독자 인기투표 결과 이토 히로부미는 10위를 기록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토 히로부미는 7살 되던 해 하급무사의 양자로 들어간다. 서구에 굴복해 나라의 문호를 개방한 막부에 반대하며 왕정복구를 주장하던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 참가했던 이토는 메이지 신정부 성립 후 정계에 투신, 1881년 국회개설문제로 정부내에 대립이 생기자 기성세력을 몰아내고 메이지정권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되고, 1888년 추밀원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국회의 개설과 동시에 귀족원 의장이 되었다. 특히 독일헌법을 기초로 한 메이지헌법의 초안작성과 양원제 의회의 확립에 기여한 공으로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메이지 일본'을 기획하고 조종하며 일본 현대화의 영웅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주의 물결 속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주창하며 일본이 그 선두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토의 목표는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면서 조선민들에게 지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한민족의 역사를 어지럽혔다.

결국 이토는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한맺힌 총탄에 목숨을 잃는다. 거사가 있기 전 안중근 의사는 그해 오늘 (3월2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11명의 청년 동지들과 함께 시퍼런 단도로 손가락을 끊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단지동맹'을 맺으며 피눈물의 맹세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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