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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17대 국회의 마지막 애국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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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해 4월 초 극적으로 협상을 타결하고, 6월 말 한국과 미국 정부가 정식 서명한 한·미 FTA는 아직 한국과 미국 어느 곳에서도 비준되지 않고 있다. 관세 인하와 비관세장벽 제거 혜택은 서류 위에서 잠자고 있다. 지난해 9월 7일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대선 후보 검증 공방 속에 실종돼 첫 관문인 통일외교통상위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시장경제와는 이념지향이 다른 일부 의원을 제외하면 명시적으로 한·미 FTA 비준을 반대하는 의원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정작 상임위조차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국회가 비준동의안을 지연시키면서 처리를 거부하고 있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협상 과정에서의 의혹을 국회 차원에서 먼저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9월 7일 정부가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날 70여 명의 국회의원들은 발 빠르게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이들의 국정조사 요구는 다분히 자기모순이다. 국회특위를 발족시켜 한·미 FTA 협상기간 내내 협상 과정을 일일이 보고받고 검증하지 않았던가. 협상 관련 모든 자료 공개, 정보열람권을 가지고 있던 특위가 아니던가(특위 소속 모 의원의 보좌관은 협상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검찰에 기소까지 됐다). 국정조사 요구가 시간 끌기, 시선 끌기의 구태라는 것쯤은 유권자들은 다 안다.

둘째, 정부가 마련한 피해대책이 불충분하다는 주장이다. 보상대책 불충분 타령은 흘러간 유행가다. 2003년 한·칠레 FTA 국회비준 과정에서 우리는 국회 회의장을 무력으로 장악한 ‘농촌당’ 의원들의 광폭한 질주를 목격한 바 있다. 칠레 농산물이 밀려와 한국 농업이 죽는다고 주장하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한·미 FTA 협상 기간 내내 IMF 100배 이상의 쓰나미가 밀려온다던 반대구호는 협상이 타결되고 내용이 공개된 이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타결된 협상 내용이 한국과 미국 양국에 균형을 맞춘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와 여론이 대세에 밀려난 것이다. 분석이 받쳐 주지 않은 막연한 피해 주장은 청산돼야 할 구태다. 자신의 지역구 생산자의 비효율성을 혈세로 땜질하는 것에 납세자들은 분노한다.

셋째, 미국이 먼저 비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미 FTA가 발효하려면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비준동의를 받아야 한다. 미국 행정부는 아직 비준동의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하지 못하고 있다. 보호무역 성향의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한·미 FTA로 인해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피해를 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한국이 미국 쇠고기 수입을 계속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준동의안 상정은 부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선레이스가 열기를 더해 가고 있는 미국의 경우 이번 여름을 넘기면 한·미 FTA 의회 비준은 부시 행정부에선 처리가 불가능하다. 2009년으로 넘어가게 된다.

혹시라도 한국 국회가 미국 의회보다 먼저 비준안을 처리하는 것이 ‘대미 종속’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판이다. 한국 국회가 먼저 비준동의안을 처리해 미국 의회를 압박하는 것이 전략적인 자주외교다. 한·미 관계의 복원·공고화를 원하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이 먼저 FTA 비준을 했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가 안 되면 당분간 표류할 운명에 처한다. 당장 4월 총선이 코앞에 닥친다. 총선 후 개원되는 18대 국회는 6월에야 열린다. 그때 가서 비준동의 절차를 다시 반복한다는 것은 국가적 낭비다. 한·미 FTA를 미국보다 먼저 비준해 외교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호기를 놓쳐 버린 국회로 17대 국회가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는가.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