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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이야기 ② - 서민의 상소길

중앙일보

입력

“전하, 길에서 구하소서!”

억울한 일이 생겼거나 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법의 문을 두드려 도움을 청한다. 날마다 쉬지 않고 법정으로 향하는 가지각색의 사연들. 하지만 법원까지 가는 길만큼은 성별, 계층 구분 없이 대부분 비슷하다. 대중교통이나 자동차를 이용하면 몇 십분 내지는 몇 시간 내에 법원 문턱을 밟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억울함을 한 번 호소하기 위해서 이역만리 중국까지 오가거나 갖은 역경을 헤치고 한양으로 입성해야 했다.
특히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신문고(申聞鼓) 제도는 만백성들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수많은 민초들을 왕이 머무는 도시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시골에서 한양으로 떠나는 길은 여비가 넉넉지 않은 서민들에게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작은 배 한 척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파리 목숨 같은 생명을 하늘님과 신령님께 맡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는 여러 척의 배와 시종들을 부리는 지배 계층의 그것과 극심하게 대비되는 풍경이다. 하지만 임금을 찾아가 직접 억울함을 호소 할 수 만 있다면 그 어떤 수난도 견딜 수 있었다. 왕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그들만의 발버둥이자 희망이었다. 관리들의 극심한 부정부패 속에서도 500년 동안이나 조선이 굳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왕조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조선의 왕조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굳게 믿고 민초들이 배를 곯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책에 혼신을 기울였다. 세종 때 이루어진 한글창제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왕의 어진 마음만으로 한 나라의 억울함을 다 보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궐 밖에 북을 매달 생각을 한 임금의 배려는 매우 감동적이지만 그 한계가 너무 일찍 드러난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부패한 세력들의 번식력은 바퀴벌레들의 그것만큼이나 끈질기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신문고의 울음소리가 그 추한 진리를 날마다 짖어대니 문제 해결을 위해 제작된 신문고는 갈증 해소는커녕 혼란과 무질서를 쉼 없이 초래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조선 초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갖가지 제약을 달게 된 신문고는 민초들과는 거의 무관한 것으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이즈음부터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간의 상소문화가 눈에 띄게 구분되었다. 서울의 관리들과 지방의 굵은 세력들은 여전히 신문고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일반 서민들을 돕기 위해 제작된 신문고 본래의 취지에 크게 벗어난 형태로 변형된 것이었다.

그 대신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들에겐 ‘격쟁’이라는 새로운 상소 수단이 생겼다. 이전의 상소 방법이 여비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여정이었다면 ‘격쟁상소’의 방법은 다소 엉뚱하고 해학적이었다. 격쟁(擊錚)상소란 궁궐의 담 위로 뛰어 올라 꽹과리를 치며 자신의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하는 제도였다. 깊고 넓은 수로(水路)가 성을 빙 둘러 흐르게 만든 유럽왕실이나 일본 중국 등지의 건설법을 떠올려 본다면 새삼 차별점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궁궐 담에 기어올라 꽹과리를 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넓기도 넓은 궁궐, 그 문(門)의 방향만 해도 사방팔방인데 왕께서 구중궁궐 어디쯤에 계실지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그래서 백성들은 임금이 길 위를 행차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서민들에게는 바로 그 때가 임금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정조대에 허용된 위외격쟁(衛外擊錚, 어가 행차 시에 이루어지는 격쟁)은 실제로 백성들의 숨통을 터주는 데 크게 일조했다. 감히 그 누가 왕의 길을 막았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은 겁을 먹거나 물러서지 않고 왕이 주신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사도세자 화성행차 당시, 한 번에 이백 회가 넘는 격쟁을 처리하느라 열흘 넘게 시간을 지체했던 사화가 이를 증명한다. 어가 길 주변에 길게 엎드려 왕의 마차가 몇 발작도 채 움직이기 전에 ‘전하~’를 외치며 파도타기를 하듯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실로 진풍경이었으리라.

왕 뿐만 아니라 지체 높은 관리들의 행차 길에도 이와 같은 풍경이 종종 벌어졌는데 김홍도의 작품 <취중송사>를 보면 그 현장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뭔가 다툼거리가 생긴 두 사람이 술 집 입구에서 수령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술자리를 갓 벗어난 수령의 발목을 붙들었다. 한 잔 걸친 후라 노곤함이 밀려드는데, 가는 길 막고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호소하는 두 사람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는 수령. 배웅 나온 기생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함께 벌을 서고 있다. 모두가 심드렁한 가운데 땅바닥에 엎드려 논쟁의 과정을 받아 적는 관속의 모습, 웃전에게 어필이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뱉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길가 구석에 숨어 구경하는 아이까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끔 그려진 단원의 그림. 당시의 거리 행차에서는 그림에 나온 것과 같은 코믹한 상황이 빈번히 발생했었다. 그리하여 어진 관리들의 애민활동과 부정한 관리들의 무관심이 함께 공존했던 백성의 거리. 그 풍경이 피지배 계층을 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지배층 특유의 전략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가련한 백성들에게, 거리는 곧 왕이 선물해준 거대한 ‘신문고’였으니까.

도움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 국사편찬위원회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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