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길에서 구하소서!”
억울한 일이 생겼거나 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법의 문을 두드려 도움을 청한다. 날마다 쉬지 않고 법정으로 향하는 가지각색의 사연들. 하지만 법원까지 가는 길만큼은 성별, 계층 구분 없이 대부분 비슷하다. 대중교통이나 자동차를 이용하면 몇 십분 내지는 몇 시간 내에 법원 문턱을 밟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억울함을 한 번 호소하기 위해서 이역만리 중국까지 오가거나 갖은 역경을 헤치고 한양으로 입성해야 했다.
특히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신문고(申聞鼓) 제도는 만백성들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수많은 민초들을 왕이 머무는 도시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결국 갖가지 제약을 달게 된 신문고는 민초들과는 거의 무관한 것으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이즈음부터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간의 상소문화가 눈에 띄게 구분되었다. 서울의 관리들과 지방의 굵은 세력들은 여전히 신문고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일반 서민들을 돕기 위해 제작된 신문고 본래의 취지에 크게 벗어난 형태로 변형된 것이었다.
그 대신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들에겐 ‘격쟁’이라는 새로운 상소 수단이 생겼다. 이전의 상소 방법이 여비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여정이었다면 ‘격쟁상소’의 방법은 다소 엉뚱하고 해학적이었다. 격쟁(擊錚)상소란 궁궐의 담 위로 뛰어 올라 꽹과리를 치며 자신의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하는 제도였다. 깊고 넓은 수로(水路)가 성을 빙 둘러 흐르게 만든 유럽왕실이나 일본 중국 등지의 건설법을 떠올려 본다면 새삼 차별점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궁궐 담에 기어올라 꽹과리를 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넓기도 넓은 궁궐, 그 문(門)의 방향만 해도 사방팔방인데 왕께서 구중궁궐 어디쯤에 계실지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왕 뿐만 아니라 지체 높은 관리들의 행차 길에도 이와 같은 풍경이 종종 벌어졌는데 김홍도의 작품 <취중송사>를 보면 그 현장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뭔가 다툼거리가 생긴 두 사람이 술 집 입구에서 수령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술자리를 갓 벗어난 수령의 발목을 붙들었다. 한 잔 걸친 후라 노곤함이 밀려드는데, 가는 길 막고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호소하는 두 사람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는 수령. 배웅 나온 기생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함께 벌을 서고 있다. 모두가 심드렁한 가운데 땅바닥에 엎드려 논쟁의 과정을 받아 적는 관속의 모습, 웃전에게 어필이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뱉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길가 구석에 숨어 구경하는 아이까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끔 그려진 단원의 그림. 당시의 거리 행차에서는 그림에 나온 것과 같은 코믹한 상황이 빈번히 발생했었다. 그리하여 어진 관리들의 애민활동과 부정한 관리들의 무관심이 함께 공존했던 백성의 거리. 그 풍경이 피지배 계층을 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지배층 특유의 전략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가련한 백성들에게, 거리는 곧 왕이 선물해준 거대한 ‘신문고’였으니까.취중송사>
도움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 국사편찬위원회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