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안데르센의 『엄지공주』 생각이 났다.
묘한 작품이라 싶었다.
등장 인물의 면면이 길례 주변에 나타난 남자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길례의 첫 남자도 「나비」였다.
지적(知的) 호기심과 방랑벽으로 반죽된 젊은이.사물에 대한 비판의식을 길례에게 심어준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곧 떠났다.한사코 매달릴 염의도 없었거니와,설령 매달렸더라도 그는 기어이 떠났을 것이다.이별은 그의 양식(糧食) 같은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나타난 남자가 남편이다.
대학때 친구가 소개했다.
견실해 보였다.「나비」의 가벼움에 질려 있었던 탓인지 현실적인 태도가 듬직했다.
결혼까지 생각한 것은 아닌데 우격다짐으로 혼사가 이루어졌다.
자기 위주의 남자였다.
그러면서도 귀가 얇아 시집 식구들의 수군거림에 곧잘 전염됐다. 넉넉지 못한 대장장이 딸이라는 것,어머니 없이 자랐다는 것,혼수도 변변히 마련해 오지 않았다는 것 등이 시집 아낙네들에겐 흠잡을 거리로 마땅했다.이런저런 홀대에 처음엔 화내고 맞서던 남편이 어느새 그들 생각에 물든 속을 길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영락없는 「황금충」이다.
어떻든 은혼식(銀婚式)을 눈앞에 뒀을 만큼이나 살았다.
견실한 것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지독한 구두쇠였다.
시장 생선가게서 싸주는 비닐봉지 나부랭이도 함부로 못버리게 했다.세제(洗劑)로 씻어 베란다에 널어 말려 또 쓰게 하는 것이다.수고도 수고지만 세제값이 더 들어 비경제적이라 타일러도 막무가내인 것은,아내를 골탕 먹이기 위한 처사로 밖에 짚히지 않았다. 혹간 맛있는 별미 음식이 상에 오르면 으레 혼자 먹어치웠다.아내더러 함께 들자거니 들어보라거니 하는 한마디 말조차없다.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인간의 정이 그리웠다.
아리영 아버지는 이런 정황 속에「왕자」처럼 나타났다.
교양과 매너로 다듬어진 세련된 분위기에 처음부터 현혹됐다.생각성 깊은 보살핌이 따스한 인품을 느끼게 했고,무엇보다 대화가가능하여 신명이 났다.
인간은 필경 대화하는 동물이다.부부도 대화할 수 있어야 이상적인 내외간일 수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한약방 아주머니의 친정 동생은 「제비」에 비길 수 있다.성실.과묵했고 길례를 짝사랑했었다.
딸이 호감을 갖고 있는 한의원 원장 아버지로 만나야 할 것을생각하니 부담스러웠지만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 조금은 궁금했다.
저녁녘.부엌에서 식사준비를 서두르는데 전화가 왔다.아리영 아버지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