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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74. 윤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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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0년 평양 통일음악회를 계기로 남북 음악가들은 이듬해부터 함께 ‘한겨레음악회’를 열었다. 93년 도쿄 한겨레음악회 때 메트로폴리탄호텔에서 만난 윤이상(왼쪽에서 둘째)과 필자(오른쪽에서 둘째).

1990년 10월 18일 아침 평양의 2·8 문화회관. ‘범민족 통일음악회’ 개막식이 열리고 있었다. 객석 수가 세종문화회관의 약 두 배인 6000석짜리 극장이다. 내 좌석은 무대 위 주빈석 중앙이었다. 중국에서 온 음악가들의 대표가 연설 도중 김일성 주석의 어록을 인용하자 6000명이 거의 반사적으로 일제히 일어섰다.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동지의 말이 인용될 때에는 이러한 예를 갖추는 것임을 직감했지만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주석의 말이 인용된다고 해서 남한 음악가인 내가 일어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혼자 앉아 있으려니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때 나는 곁눈으로 무대에 함께 앉아 있는 작곡가 윤이상을 보았다. 베를린과 평양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던 그도 그냥 앉아 있었다. 비로소 안심이 됐다. 청중석의 우리 단원들은 나를 주시하며 역시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윤이상과 나는 74년 네덜란드 브로이케른이라는 곳에서 처음 만났다. 세계 음악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그와 내가 한국의 대표 작곡가로 참석한 것이다. 행사장은 옛 귀족의 저택을 개조해 만든 음악센터로 풍경이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우리는 1주일 동안 함께 지냈는데 내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고 감탄하자 그는 “그래도 어디 한국만 하겠어요”라고 했다. 고향을 뜨겁게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심포지엄이 끝나는 날 술을 함께 마시며 “현대예술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기꾼이 많지. 어쩌면 나도 사기꾼일지 모르지”라고 하던 그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후 80년대 초 독일 자아르브뤼켄에서 현대음악제가 열렸을 때도 만났다.

 이 두 번의 인연으로 윤이상은 내게 평양에서 열리는 통일음악회의 초청장을 보냈던 것이다. 판문점을 거쳐 개성에서 기차로 평양에 도착하니 내가 내리는 출입구 바로 앞에 서 있던 윤이상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이 음악제를 위해 ‘우리는 하나’라는 곡을 작곡해 갔다. ‘우리는 하나’라는 구절만 내내 반복하는 성악곡이다. 소프라노 윤인숙이 불렀다. 윤이상은 “황 선생, 그거 참 재미있는 곡이야”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를 한 번 들으니 호기심이 나고 두서너 번 들으니 지루해지더라고. 근데 대여섯 번이 넘어가니까 상당히 재미나던데”라며 껄껄 웃었다. 참으로 묘한 평이었다.

 90년 10월 14일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서울전통음악연주단’ 환영만찬에서 남북 예술인들이 분단 사상 처음으로 한데 어우러져 노래하고 춤추는 사이 윤이상은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우리가 평양을 떠나기 전날 송별만찬에서 남과 북의 예술가들이 얼싸안고 춤출 때 그는 더욱 흐느꼈다. 윤이상은 음악가로서만 살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은 정말 뜨거웠다.

황병기 <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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