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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 떨어진 적 없는 MB ‘장로 선거’선 딱 한 번 고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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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지난해 12월 19일 밤. 자정이 가까워 오면서 이명박(MB)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당선이 확실해졌다. 그때 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차를 타고 급히 나섰다.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집으로 향한 이 부의장은 김 목사를 모시고 MB의 서울 가회동 자택으로 가 심야 가족예배를 드렸다. 선거기간 중 마음고생 때문인지 두 형제 장로의 기도 소리는 더 뜨겁고 간절했다. 서울시장 선거일인 2002년 6월 13일 밤에도 그랬다. 당선이 확실하다는 개표 방송이 나오자 MB는 소망교회 김천수 주임목사를 전화로 깨웠다. 곽선희 당시 담임목사는 해외 출장 중이었다. “본당에서 함께 기도하자”는 부탁이었다. 김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교회에서는 찬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 이명박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부분이 그가 30년째 다니는 서울 신사동 소망교회다.

20일 오전 7시20분쯤 소망교회 본당. 1부 예배 시작을 10분쯤 앞두고 경호원 두 명이 본당 중앙통로를 오가며 주위를 살핀다. 잠시 후 이 당선인이 또 다른 경호원들을 따라 앞문으로 들어와 맨 앞좌석에 앉았다. 대선 이후 매주 일요일이면 벌어지는 풍경이다. 인수위 보고가 있었던 지난 13일만 예외였을 뿐 당선인은 빠짐없이 일요 예배에 나왔다.

‘눈에 띄지 않게 하라’는 당선인의 지시도 있었던 데다 교회 특성상 입구에 검색대를 설치하기가 곤란해 특별 경호작전이 동원된다. 전날 담임목사에게만 참석 시간이 통보되고 평소의 두 배 가까운 경호인력이 투입된다. 교회 본당 곳곳에는 찬송을 부르는 경호 요인들이 깔려 있다(교회 장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런 경호상 번거로움 때문에 당선 이후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교회 출석을 고집하는 것은 오랜 예배 습관 때문이라는 게 주위 사람의 얘기다. 당선인을 20년 이상 봐온 이 교회 김모(65) 집사는 “일요일 아침이면 당선인은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고 지인들과 차를 마시고 행상에서 뻥튀기나 생활용품 사는 것을 워낙 좋아했다”고 말한다.

이날 김지철 담임목사는 설교 말미에 “이명박 장로가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교회에서 자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그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당부했다.

대통령 되기보다 어려웠던 소망교회 장로

공직 선거에서 이 당선인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의 터줏대감이던 국민회의 이종찬 후보를 이겼고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선 민주당 김민석 후보를 눌렀다. 지난 대선에선 직선제 선거로는 사상 최다 표차의 완승을 거뒀다.

그런 당선인도 고배를 마신 선거가 있다. 94년 5월 소망교회 장로 선거였다. 수요 예배에 모인 신도들이 두 차례 투표로 뽑는 장로 선출에서 이상득·이명박 형제는 나란히 탈락했다. 신도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2차 투표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이 교회의 한 원로장로는 “소망교회 장로는 유명인이라고 해도 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력 인사라고 해서 특별히 우대해주지 않는 게 교회 분위기라는 것이다. 여덟 번째 도전 끝에 장로가 된 법조계 인사도 있다.

이듬해 이상득·이명박 형제의 장로 동시 선출은 이런 점에서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다. 두 형제 부부의 열성적인 교회 봉사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선인은 92년 14대 국회의원이 된 후 3년4개월간 일요일 새벽 6시에 나와 주차봉사를 했다. 이 교회에서 주차봉사는 신도들에게 얼굴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장로가 되기 위한 필수코스로 꼽힌다. 당선인의 관할구역이었던 본당 앞 주차장 봉사는 골목길 봉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티가 더 나’ 효과도 크다고 한다.

두 부인의 역할도 컸다. 두 동서는 예배 후 교회 구내식당에 가 앞치마를 두르고 국을 뜨며 1000명 이상의 식사 준비를 도왔다. 당선인의 부인인 김윤옥 여사는 2부 예배(오전 9시30분) 성가대로 활동했고, 이 부의장의 부인 최신자 여사는 지금도 3부(오전 11시30분) 성가대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부의장은 늘 혼자서 2부 예배를 본다.

어렵게 얻은 장로직이기에 당선인의 애착과 자부심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쁜 일정 때문에 교회의 보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서울시장 시절 공관으로 자주 장로들을 불러 식사를 함께할 만큼 각별히 챙겼다. 한 동료 장로가 외국으로 1년간 선교활동을 떠날 때는 시장실로 불러 개인 돈 2000만원을 주기도 했다.

등록 교인이 6만 명에 달하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소망교회 예배 모습이다.

대통령 당선 뒤 신규 신도 급증

당선인이 소망교회 신자로 등록한 것은 78년 12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민 10명이 만든 ‘바이블 스터디’가 77년 10월 단지 내 상가 교회로 발전한 지 1년 뒤였다.
초기멤버인 이상정 원로 장로는 “당시 곽선희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현대아파트 주민들이 많이 몰렸는데 이 무렵 당선인 형제도 등록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후에 큰형 부부(이상은·박청자)도 등록해 3형제가 같은 교회에 다닌다.

81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현재의 본관 건물이 들어서면서 소망교회는 대형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건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교회는 건축 헌금이 들어오는 대로 공사비를 나눠 지급하기 때문에 대형 건설업체들은 공사를 꺼린다. 그러나 소망교회는 국내 1위 업체인 현대건설이 공사를 맡았다. 이명박 사장의 지시 덕분이었다.

이 교회의 A장로는 “당시 현대건설은 공사비를 실비로, 그것도 후불 방식으로 받았다”면서 “지금 같았으면 사장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얘기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건설에서 나와 국회의원(92∼98년)을 할 때가 당선인이 가장 열심히 교회에 봉사했던 기간이다. 장로도 이때 됐다. 서울시장이 되고서 교회활동은 줄었지만 일요 예배는 거르지 않았다. 예배를 마치고 동료 신자들과 차를 마시고 청계천 복원의 당위성을 설명하는가 하면 딸의 중매도 부탁하곤 했다. 시장 퇴임 후 한나라당 경선 전까지는 전국 교회를 돌며 신앙간증 형식의 특강을 많이 했다.

소망교회를 개척한 곽 목사와의 오랜 인연도 많이 얘기된다. 하지만 곽 목사의 은퇴 과정에서 빚어진 교회 내 갈등의 와중에서 한때 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말이 돌았다. 이 문제로 장로 간 대립이 고조되던 2002년 12월 형인 이 부의장은 ‘곽선희 목사 퇴임 준비위원회’ 의장을 맡아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MB 당선은 소망교회 교세 확장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평이다. 이 교회는 2003년 담임목사 교체를 계기로 교세가 다소 위축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왔다. 하지만 대선 이후 ‘MB 효과’로 신도 수가 빠른 증가세로 돌아섰다. 최근 주보에 실리는 신규 등록자 명단의 글자 폰트가 작아졌다. 이전에 30∼40명이었던 새 신자가 대선 이후 평균 120명 수준으로 급증하면서 지면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당선인이 불참한 지난 13일 예배에서는 “우리 교회 성도를 대통령에 당선시켜 주신 것에 대해 감사 드린다”는 기도가 나오기도 했다. 대립 양상을 보이던 장로 간 갈등도 대선 이후 단합 모드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MB ‘실용주의’ 근간

그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 신앙이 최대의 유산”이라고 말해왔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새벽 4시면 단칸방에서 자던 형제들을 깨워 무릎을 꿇리고 엎드려 기도하게 했다고 한다. 여동생은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고 이 당선인이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주님’ ‘기도’ 등을 입에 달고 다녔던 장로 이명박의 모습은 이제 보기가 어렵다. 서울시장 시절 이른바 ‘서울 봉헌 발언’ 파동으로 마음고생을 하면서 그는 교회 장로라는 점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명박의 마음 중심에는 교회와 성경이 있다. 그의 오랜 측근인 서울대 유우익 교수는 이 당선자의 ‘실용주의’를 세종의 실용주의와 미국의 청교도 개척정신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신을 향해 기도를 하면서도 근면하게 땅을 개척하고 부를 축적했던 청교도 정신이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정치인으로 대성한 신앙인 이명박 장로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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