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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Eye] 중앙은행 총재들의 수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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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30면

중앙은행 총재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으로 일반에 인식돼 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경제 대통령’으로까지 불린다. 실제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은 데도 그 과장된 인식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면 곧잘 ‘동네북’이 된다. 금리를 내리면 시장에 굴복했다고 욕을 먹고, 시장 쪽에선 ‘뒷북’을 쳐 효과가 없다며 크게 반기지도 않는다.

중앙은행의 기본 권한은 통화량 조절이다. 그러나 금융기법 혁신으로 통화와 금융자산 간의 구분이 갈수록 흐려져 정확한 통화량 산정 자체가 어렵다.

미국은 앨런 그린스펀 의장 때부터 금리 조절로 방법을 바꾸었다. 소위 닷컴거품 붕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린스펀은 금리를 1%까지 내렸었다. 장기간의 초저금리가 주택산업을 자극하고 투기적 대출과 모기지 거품을 부풀려 오늘의 서브프라임 부실 사태를 불러왔다는 진단이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미국인들이 누린 호황은 간 곳 없고 오늘의 위기 원인 제공자로 그린스펀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1929년 대공황도 실은 연방준비은행(Fed)의 무능한 관료들이 금리를 무리하게 올려 유동성 숨통을 막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새롭게 나돈다. 밀턴 프리드먼은 유동성 조절에 우유부단한 중앙은행을 아주 뜨거운 물과 아주 찬물을 번갈아 트는 ‘샤워장의 바보’에 비유하기도 했다.

경제 살리기와 인플레 억제가 대립되는 정권 교체기나 선거의 해는 곧 중앙은행 총재들의 수난기였다. 미국의 닉슨은 72년 재선 때 ‘인플레 때문에 선거에 진 사람은 없었다’며 아서 번스 의장에게 돈 풀기를 강요했다. ‘인플레 투사’ 윌리엄 마틴은 존슨 대통령 목장에 불려가 베트남에서 청년들이 죽어가는데도 돈을 제때 풀지 않는다고 대통령으로부터 손찌검까지 당했다고 한다. 카터는 폴 볼커의 긴축정책 때문에, 조지 부시 1세는 그린스펀의 긴축 때문에 각기 재선에 실패했다고 비난했을 정도다. 중앙은행 총재가 선거를 결정짓는다는 얘기는 검증되지 않은 신화다. 신화의 주인공이기는커녕 정치적 비난 게임의 희생양들이다.

지금 세계의 주요 중앙은행 총재들은 신용 금융경색에서 오는 당장의 패닉을 막고, 경기 침체를 회피하면서, 인플레를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묶어 두는 3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어느 하나도 쉽지가 않다. 금리인하는 진통제이지 치료제가 아니다. 유가와 식품가격이 천장을 모르는 상황에서 인플레를 키워 고물가 속의 침체 즉 스태그플레이션을 불러올 위험도 크다. 미국의 더 이상의 금리인하는 외국 투자가들의 달러화 이탈을 촉진해 달러 체제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유럽 중앙은행 총재가 인플레 우려 때문에 협조적 금리인하에 난색을 표해 국제공조 체제에도 불안을 안기고 있다. 게다가 신용위기는 대형 손실이 꼬리를 물면서 금융기관들의 손실 발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느낌마저 준다. 너무도 많은 거품이 너무 오랫동안 쌓여와 미래의 더 큰 재앙을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침체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중앙은행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정권 및 총재 교체기를 맞아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라는 정치권 쪽 압박은 이웃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난세에 금융경제학자 출신의 밴 버냉키 FRB 의장은 합리적 기대와 경제 과학으로 경제를 건전 궤도로 유도하는 ‘총명한 엔지니어’임을 자처한다. 정치에 휘둘려 반짝했다 망가지는 ‘경제 대통령’보다 ‘위대한 중앙은행가’의 길을 걷겠다는 얘기다. 통화가치 수호를 위한 ‘구도자(求道者)’의 길은 외롭고 험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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