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 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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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시청앞에 멋없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고 거리를 걸을 때면 어디선가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나는 그 연말연시를세상에서 한발짝 떨어져서 사는 사람처럼 지냈다.내가 한 일이 있다면 써니를 정신병원에 남겨놓고 돌아온 다음날 바로 동회와 구청.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서류를 갖춰서 병무청에 「우선입영 희망원」을 제출한 일이었다.
희수는 지구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터였고 소라는 용호도에서겨울바다를 느끼며 시를 긁적이고 있을 거였다.훈련을 마치고 양구쪽의 부대에 배치된 윤찬이 간혹 엽서를 보내왔지만 나는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답장을 떼어먹고 있었다.상 원이는 본고사준비에 매달려 있었고 영석이와 승규가 간혹 뭉치자는 전화를 걸어왔지만 나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를 대며 혼자서 겉돌았다.나는누군가와 나누고 싶지 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지 몰랐다.
연말에 형이 휴가를 나왔는데,검은 얼굴에 짧은 머리를 한 형은 갑자기 어른스러워보였다.어머니는 형을 보니까 살맛이 나는지얼굴에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고,아버지는 형의 어깨를 토닥이면서고생 많았다고 치하해 주셨다.군복을 입은지 1 년이 넘게 휴가를 나오지 않은 건 사죄의 의미였다고 형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 말씀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그즈음의 내가 외출을 삼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낮이면어머니와 형과 나 이렇게 셋이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는데,한번은어머니가 한손으로 형의 궁둥이를 툭툭 치면서 그러셨다.
『그쪽 엄마 사실 보통은 아니더라.그렇지만 완전하게 합의를 봤어.너한테 뒷말은 전혀 없을 테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알았지?』 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을 뿐이었다.나는 어머니의 말뜻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형과 나미라는 여자 사이에 생겼던 아이 이야기일 거였다.비록 세상에 나와서 빛을 보지는 못한 아이였지만.
하루 저녁은 형과 둘이 신촌역 근처의 호프집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심심한데 둘이 한잔 어때? 이렇게 내가 제안한 자리였다. 『나미라는 여자의 편지 받았어? 그 편지 내가 직접 만나서받은 거였거든.그런데 몇달 전에 그 동네에 갔다가 보니까 그 카페는 없어졌더라구.』 『다 들었어.나미가 면회와서 이야기해줬어.니가 아주 매력있는 놈이라구 그러던데.형보다는 낫다구 말이야.』 형이 생맥주컵을 들어서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나서 또 말했다. 『딱 한번이었어.면회온 건… 확실하게 헤어지는 절차였어.나도 이젠 괜찮아.제대할 때쯤 되면 다 잊혀져 있겠지 뭐.』형이 또 맥주를 입에 들이부었다.아직 다 잊지는 못했다는 소리인 거였다.나는 우선입영 희망원을 냈으며 그래서 곧 나도 입대하게 될 것이라고 형에게 말했다.
형은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나는 그때까지도 집에는 말을 하지못하고 있었다.
나는 형에게 써니와의 일을 간추려서 말했다.
형은 진지하게 내 말을 듣고 있었는데,말하다 보니까 내가 써니와 나의 관계를 너무나 간추린 것 같아서 나 자신에게 불만이었다.써니와 나의 관계란 요약될 수 있는 그런 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형이 귀대하고 난 며칠후,나는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그날밤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우선입영 희망원의 제출 사실을 통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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