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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접대비 실명제 재검토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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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우리나라 접대문화는 과도하다. 국세청 집계에 따르면 2002년 기업들이 접대비로 쓴 금액이 4조7000억원이다. 접대비 한도(매출액의 0.03~0.2%) 때문에 다른 계정에 숨겨 사용하는 실제 접대비까지 합하면 10조원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기업 탈세 건수의 43%가 접대비로 쓰고 일반 관리비 등으로 변칙 처리한 경우였다니, 기업들이 접대비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는지 알 수 있다. 과도한 접대문화가 기업 경쟁력도 약화시킨다.

접대문화의 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국세청이 지난 1월 도입한 접대비 실명제는 접대문화의 개선이란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부작용만 일으키고 있다. 접대비 실명제는 건당 50만원 이상 접대비를 쓸 때 업무 관련성을 입증하도록 접대 상대방과 접대 목적을 기록하도록 한 제도다.

이에 대해 전경련이 어제 발표한 기업 조사결과에 따르면 기업의 96.5%가 접대비 실명제를 피하기 위해 영수증 쪼개기 등 변칙적인 관행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런 변칙은 모든 기업인을 불가피하게 범법자로 만든다. 국세청은 이런 변칙을 트집잡아 기업인을 겁줄 수 있다. 기업인은 관청에 걸려들 또 하나의 올가미를 쓰게 된다.

제도의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것이다. 대부분 기업이 지킬 수 없는 기준은 고쳐져야 한다. 명분만 좋다고 현실과 동떨어진 제도를 만들어 봐야 편법만 판치고 사회적 낭비만 초래한다.

실시 시기도 적절치 못했다. 정부가 경기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판국에 국세청이 소비 위축을 불러올 게 뻔한 접대비 실명제를 도입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정책은 이상(理想)이나 명분만 내세워서는 안된다. 최선을 추구하되 현실을 반영해 실효성을 따지고 적절한 시점을 택해 점진적인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 게 경제정책이다. 이헌재 신임 경제부총리가 "의도가 좋다 하더라도 정책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며 접대비 실명제의 섣부른 도입을 비판한 것도 이 같은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접대비 실명제는 즉각 재검토하는 게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