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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日帝의 쇠말뚝 뽑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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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나라에 풍수지리(風水地理)가 들어온 것은 신라말 도선(道詵)에 의해서다.도선은 중국의 참위설(讖緯說)을 토대로 독자적풍수지리설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이『도선비기(비記)』다.
고려조에 들어오면서 풍수지리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됐다.태조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서경천도(西京遷都)를 둘러싸고 일어난 묘청(妙淸)의 난은 그 좋은 예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풍수지리의 중요성은 줄지 않았다.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풍수지리에 따라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결정했다.그후 효(孝)와 조상숭배가 조선사회의 절대적 규범으로 자리잡으면서 음택(陰宅)위주의 묘지풍수가 주류가 됐고 풍수지리,즉 묘자리 명당(明堂)찾기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중기이후 그 폐해가 극심,실학자들로부터 망국(亡國)의 표본으로 공격받았다.
하지만 풍수지리는 왕실.양반계층은 물론 민간에서도 계속 강한영향력을 유지했다.조선조 말기 홍경래(洪景來)나 전봉준(全琫準)은 풍수사상의 메시아니즘적 측면을 강조해 민중을 봉기로 이끌었다. 일제(日帝)식민통치시대에도 풍수사상의 脈은 끊어지지 않았다.일제는 한국인들이 풍수지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이를 逆으로 이용해 한국인들의 머리속에 패배의식을 심었다.그들은 한국인 지관(地官)들을 앞세우고 전국 각지의 명당 자리들을 찾아내 땅의 氣와 맥을 끊었다.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서길수(徐吉洙)서경대(西京大)교수는 이를 일제의「풍수침략」이라고 부른다.徐교수가 지난 10년간확인한 풍수침략 사례는 1백54건.이중 45건은 임진왜란 당시명(明)나라 이여송(李如松)이,62건은 일제가 저지른 것이며,나머지는 불명(不明)이다.徐교수는 일제의 풍수침략 유형으로▲산봉우리에 쇠말뚝 박기▲쇳물 녹여붓기▲구덩이를 파고 불로 뜸뜨기▲궁궐의 공원화.건물 신축등을 들면서 실제 건수는 자신이 조사한 숫자의 5배이상일 것으로 추정한 다.
정부는 올해 3.1절 기념사업으로 일제가 우리 땅에 박은 쇠말뚝 제거와 개악(改惡)된 지명의 회복을 정부 주도로 실시한다.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민족정기(民族正氣)고양(高揚)이란 측면에서 뜻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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