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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세희의 남자 읽기] 혼수가 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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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자식 혼사에 부모가 얼마나 도움을 줘야 하는 걸까? 26세 된 큰딸 결혼식을 앞둔 J씨(51)는 이 문제로 한 달째 아내와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는 서민가정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이 땅의 보통 아버지다. 아내와는 첫 직장에서 만나 3년간 연애 끝에 결혼해 딸.아들을 두고 있다.

J씨는 이제껏 실직 한번 안 하고 살았지만 남다른 재주가 없다 보니 두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것도 벅찼다. 다행히 아내가 부업을 하며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었다.

공부를 잘했던 큰딸은 청년 실업난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 후 곧바로 괜찮은 직장에 취직해 3년째 다니고 있다. J씨 자신은 대학생활을 생각도 못했기에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니는 딸이 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남자를 사귀고 결혼 얘기가 나오면서 J씨에게 근심이 생겼다. 딸은 유난히 남보다 앞서고 싶은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번듯한 신랑감과 번듯한 곳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 했다. 다행히 잘 사는 집 '사'자 신랑감을 사귀어 결혼 얘기가 오가는 모양이다. 아내는 신이 나서 그런 남자에게 걸맞은 혼인을 하려면 기본으로 드는 비용만 해도 이만저만 하다고 J씨에게 설명한다.

물론 J씨도 딸이 좋은 남자 만나 멋진 결혼식을 치렀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돈 벌 가능성이 많다고 좋은 남자인 것도 아니며, 많은 돈을 들여야 멋진 결혼식을 치르는 건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반면 아내는 무리를 해서라도 일단 딸을 잘 시집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형편대로 하자'고 했다간 부성애 없는 몰인정한 아버지로 몰릴 것 같고, 아내의 말을 따르자니 뒷감당이 엄두가 안 난다.

우선 J씨는 결혼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내와 딸에게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결혼을 통해 현실적 성취감을 맛보고 싶은 사람에겐 지루한 설교로 들릴 가능성이 크다. 또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했다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사랑 없이 결혼했다가도 자신들이 천생연분임을 발견하는 쌍도 드물지 않다.

아내의 주장을 무작정 반박하기보다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결혼은 성인 남녀의 만남이다. 따라서 당사자 간 합의가 가장 중요하다. 즉 딸과, 딸이 사귀는 남자의 결혼에 관한 견해와 합의 사항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둘의 결혼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상황에선 결혼이 불가능한지, 딸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 또 노년기를 바라보는 부모가 성인 자녀의 혼사에 기여할 수 있는 한계점을 딸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줘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당사자 간, 부모.자식 간 서로에 대한 기대치를 지레짐작이 아닌 현실적으로 파악해야 결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잡음을 줄일 수 있다. 부부 간, 부모.자식 간에 조금씩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공존의 미덕을 쌓는 과정에서 애정이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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