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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 ③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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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14면

어느 날 한 조각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든 저 덩어리가 뭔지 모르겠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 년 열두 달을 굴려 만든 작품인데도 말이에요. 원래는 저 멀리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형상화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은 저 덩어리가 ‘나’ 자신으로 느껴져요.” 그가 가만히 자신의 작품을 바라봤다. 내게는 오히려 그 덩어리가 지친 조각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주의 중심축을 움직이시느라고 그렇게 힘드셨군요”라고 무심히 답을 했다. 그가 만든 것의 실체는 무형(無形)의 흙덩이였지만, 그것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은 우주의 정신 같은 침묵이 아니었을까.

‘몸’의 예술, 그 초석을 놓다

사실 조각가의 말이 맞았다. 그 사람이 만든 작품은 바로 그 사람 자체다.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 가운데 실체를 떠나 정신이 따로 있는 것은 없다. 지각하는 모든 것은 몸, 혹은 신경이라는 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이 곧 조각가인 것이다. 이날 조각가와 내가 나눈 대화는 메를로-퐁티적 담론을 떠올리게 한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세계 전체가 유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거대한 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예술이 ‘몸(모든 것이 하나로 엉켜 있는 실체)’을 화두로 삼는 작업에 몰두한 현상은 퐁티의 생각이 영향을 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퐁티는 우리가 매일 온몸으로 체험하는 구체적인 세계를 탐구했다. 몸의 모든 운동성이 세계의 원초적인 앎에 해당한다고 봤다.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suivi de notes de travail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음, 1964, 동문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다. 우리는 항상 사물 자체를 본다. 세계란 우리가 보고 있는 것,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로 얽혀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다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체를 보는 방법을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 퐁티의 이야기다.

퐁티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퐁티처럼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는다. 이때, 남자는 자신이 여자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여자에게 자신의 손이 잡힘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의식은 능동과 수동의 구별 없이 얽히고 사랑이라는 하나의 의식에 소속된다. 남자는 자신의 사랑의 경험에 비추어 이 사랑을 본다. 여자도 자기 내부의 사랑을 기준으로 남자를 본다. ‘나’의 사랑은 나의 시각을 떠나지 않은 채, 상대의 시각을 점유하며 통한다. 사랑은 손을 잡는 행위, 그 현상에 실체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사랑은 하나다. 너와 나는 서로 각자의 존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끼리 싸울 일이 없을 듯싶다. ‘퐁티 식으로 보는 방법’을 연습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세상을 본질적으로 잘 파악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쉼 없이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해 고통받는 예술가에게 퐁티가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누구를 만지는 것은 자기를 만지는 것이고, 무엇을 본다는 것은 자기를 본다는 것이다. 모든 신체가 나의 살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 어떤 예술, 어떤 삶을 만들어갈까. 어쩌면 이미 세상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는 매일 온갖 편견과 엉뚱한 신념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묻게 된다.

※신(新)고전=지난 반세기 동안 출간된 책 중 현대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문제의식을 제공한 명저.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산하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중앙SUNDAY 독자들에게 매주 한 권의 신(新)고전을 골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