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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코지, 취임과 함께 장관 수 절반 줄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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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04면

1789년 대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은 프랑스에서는 거시적·이념적 관점에서 정부혁신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국가가 어디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느냐는 것이 정부혁신을 둘러싼 이념 투쟁의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전통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당제에 기초한 안정적 정당정치가 뿌리 내림에 따라 좌·우의 정책 논쟁으로 꽃피며 국가주도형 경제발전(형평·분배)과 민간주도형 경제발전(경쟁·성장)의 대립항을 만들어냈다. 아직까지는 국가주의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프랑스라고 하겠다. 강력한 공권력으로 무장한 ‘부유한 정부’가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해 조정자로, 심판자로, 서비스 제공자로 활약하며 국가 발전을 선도해 왔다는 얘기다. 비대해진 복지국가의 재정지출이 부담스러워진 1970년대 후반부터 영국을 필두로 시작한 신공공관리적 개혁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본격적인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출범한 1기 내각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르코지는 15자리의 장관직 중 7개를 여성 인사로 채움으로써 ‘성평등 내각’ 공약을 실천했다. 중앙포토

프랑스 정부혁신은 공공서비스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돼 왔다. 수차례에 걸친 정부교체에도 불구하고 95년을 즈음해 안정적으로 제도화되었다. 특히 98년 사회당 조스팽 총리가 전 부처에 행정현대화 연차계획 수립을 지시함으로써 각 부처 특성에 맞는 업무혁신 중장기계획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조스팽 정부는 행정제도 정비와 행정조직 운영방식의 혁신이라는 두 개의 큰 틀에서 공공경영론과 민간부문에서 시행되는 탄력적 인사관리를 도입했다. 유럽 통합과 지방 행정의 활성화, 민간부문의 성장에 따른 정부 위상과 기능 변화를 고려해 시민의 편익을 위해 봉사하는 공공서비스 개선을 지향하고, 지방 분권화를 촉진하며, 중앙정부는 전략적 기능만을 담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공공관리적 개혁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프랑스가 거시경제의 불안정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음도 사실이다. 지나치게 큰 정부 규모도 공공지출을 높이는 데 한몫하고 있다. 인구 6300만 명의 프랑스에서 공무원 수는 군인과 경찰을 포함해 510만 명으로 경제활동인구의 27.3%에 해당한다. 봉급생활자로 치자면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공무원이다. 인구 8300만 명인 독일의 공무원 수는 400만 명에 불과하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전 세계 55개국의 2007년도 국가경쟁력 순위 역시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프랑스는 전체 국가 중 28위를 차지했다. 지난해의 30위에 비하면 두 단계 상승한 수치이긴 하나 서유럽 국가들 중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을 제외하고는 최하위 수준이다. IMD는 이번 국가경쟁력 발표에서 1위를 차지한 미국을 기준으로, 현재의 경쟁력 추세로 갔을 때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국가군과 오히려 더 차이가 벌어질 국가군으로 구분해 발표했다. 프랑스는 영국·핀란드·스페인 등 15개 국가와 함께 격차가 더 벌어질 국가군으로 분류됐다. 실제로 세계은행의 지표를 살펴보면 세계 30대 경제대국 가운데 경제적 역동성이 영국 다음으로 낮은 곳이 프랑스다.

이런 상황에서 니콜라 사르코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영국병’에 이어 ‘프랑스병’으로 굳어진 오랫동안의 저성장, 국가의 미래를 저당 잡는 청년 실업, 프랑스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이기를 원하지만 결코 프랑스인이 될 수 없는 이민 2, 3세대의 사회 부적응, 할리우드에 빼앗긴 문화대국의 자존심, 이 모든 것이 한데 버무려져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광범위하게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재무장관과 내무장관 시절에 보여준 사르코지 개인의 과감하고 단호한 실천력과 젊은 남성에 대한 기대도 빼놓을 수 없는 양념이다.

취임과 함께 사르코지 대통령은 장관 수를 기존의 30명에서 15명으로 대폭 줄였다. 연금 수술 등 공공부문 개혁안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사르코지 혁신의 결정판은 지난해 12월 12일 발표한 97개항의 국가개혁안이었다. “말만의 국가개혁은 이제 그만합시다…. 내가 그것을 약속했으니, 반드시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동안의 ‘실패’를 질책하는 그의 어조는 단호하다. ‘정책 현대화’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사르코지 혁신은 ‘적은 수이지만 더 좋은 처우를 받는 공무원들과 함께 이용자가 만족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정부 건설’을 모토로 삼고 있다.

조직 간 중복기능 폐지와 통합, 중앙업무의 지방 이양으로 중앙부처 수를 반절로 줄이는 등 대대적인 공공조직 개편에 나서 공무원 정원을 획기적으로 감축하는 한편, 규제개혁과 행정절차 간소화를 통해 행정을 기업과 국민의 손에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판 펜타곤(국방부)’이다. 파리 도심에 흩어져 있는 각군 사령부를 하나로 합쳐 교외에 재배치하는 계획이다. 사르코지는 “공공행정 부문에 연간 10억 유로가 소비된다”며 “혁신안을 통해 8억5000만 유로까지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했다. 또 “관료주의를 불식시키면 프랑스 기업들이 매년 150억 유로의 비용절감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강단 있는 자세로 이러한 개혁작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해 10~11월 공기업 특별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대중교통 노조의 파업에 “이런 식의 파업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맞서 파업을 철회시키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르코지 대통령의 등장이 영국식의 신자유주의적 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급한 예측이 될 것 같다. 향후 프랑스는 노동시장, 조세제도, 연금과 건강보험 제도에 변화가 예상되지만 대처주의적 혁신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사르코지 혁신이 한편으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감세정책 등 기업환경 개선을 도모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산업과 기업을 보호하는 신콜베르주의(신중상주의)의 전통을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으로 사회보장을 일정 수준 유지하면서 기업환경을 개선하고 기업경쟁력을 강화하려는 프랑스 우파의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공공지출 절감과 질 좋은 행정서비스 제공,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 배낭을 꾸린 사르코지의 혁신 사냥이 성공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것이 무엇이든 주어진 특정 시점에서 자국의 현실에 맞는 정부혁신을 디자인하며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정부를 만들기 위한 프랑스인들의 노력이 좌·우의 정책토론을 거치며 더욱 ‘프랑스적인’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사르코지의 혁신 역시 한 시기에 나타나는 행정현상의 결핍을 보충하고 잉여를 상쇄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 그 자체로서 일정한 성과를 창출할 것이다. 지난 시기의 혁신처럼 이번에도 절반의 성공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절반의 실패로 보는 또 다른 정부가 그 뒤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는 전후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나 세계 경제 5위의 자리를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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