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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권리를 위하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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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24면

재미 설치미술가 강익중씨가 ‘세계문화오픈(WCO) 2004’를 축하하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에 설치한 작품 ‘꿈의 달’. 중앙포토

세상에는 두 파(派)가 있다. 진보파와 보수파? 아니다. 그러면, 통합신당파와 한나라당파? 그것도 아니다. 한쪽은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고, 다른 한쪽은 “저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 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안고 있다. 당신은 어느 파인가. 아마도 한때는 ‘환상’파였지만 어느덧 ‘저금’파가 되었을 터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느 파를 손들어 주는가. 당연히 ‘저금’파다. 오로지 돈과 건강만을 추구하는 삶이란, 기실 얼마나 속물적인가. 그럼에도 세상을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것은 이들이다.

『달의 바다』정한아 지음, 문학동네 펴냄, 184쪽, 8500원

정한아의 『달의 바다』는, 꿈꾸는 이들이 현실주의자들에게 멸시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왜 있지 않은가,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 지친 어깨에 토닥여 주는 손길을 느끼는 듯한 분위기, 바로 그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신문사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한 은미에게 할머니가 미국에 다녀오라 한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고모를 찾아가 보라는 것이다. 전도가 양양했던 여성과학자였다, 고모는. 그런데 미혼모가 되었고, 재미교포와 결혼해 미국으로 갔고, 이혼하고 아이를 한국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소식이 끊겼다.

할머니는 그동안 고모와 연락이 있었다. 일방적이긴 하지만 편지가 왔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고모가 미국에서 우주비행사가 되었는데, 극비로 추진하는 사업에 참여하다 보니 가족에게 알리지 말라 했단다. 근데 왜 갑자기 미국에 가보라는 것일까. 곧 달에 가는데, 이번에는 아예 그곳에 정착할 예정이라 소식이 끊어질 수 있는 모양이다. 아직은 지구와 달을 오가는 우체부가 없으니 말이다.

고모집에서 이것저것 살피다 보니, 정말 다 있었다. 케네디 우주빌딩의 열쇠, 출입증, 자격증이. 신났다. 고모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조금 이상하긴 했다. 생각한 것과 달리 출입절차가 까다롭지 않았다. 고모가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드디어 고모가 일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하나, 그곳에는 “어떤 비밀문도 눈에 띄지 않았고, 사무실이나 연구소로 보이는 방도 없었다.” 샌드위치와 기념품 따위를 파는 “우주 간이역이라는 이름을 붙인 판매대였다.”

고모가 아들을 친정으로 보낸 다음, 할머니는 빛을 잃었다. 그 딸이 있었기에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다. 그 딸과 함께했기에 삶의 보람이 있었다. 더 이상 딸을 자랑 삼을 수 없게 되니, 할머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편지가 오면서부터는 상황이 반전되었더랬다. 비록 비밀에 부쳐야 했지만, 아무도 모르게 할머니에게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도록 했던, 붕붕 떠오르는 에너지, 빛깔 같은 것”이 흘렀을 터다. 은미가 물었다, 고모에게. “왜 할머니한테 가짜 편지를 쓴 거야?” 고모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실용’이란 말로 “저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 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맹렬하게 ‘전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하나,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현실에만 있지는 않은 법이다. 그곳이 비록 허약하고 가짜 같고, 곧 바스러질 것 같으나 꿈과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삶을 버티지 못한다. 정한아는 『달의 바다』에서 다시, 꿈의 효용성을 말하고 있다. 그 효용성이란 역설이니, 쓸모없기에 쓸모있는 것이지 않던가. 지친 영혼들이라면, 아래에 인용하는 할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위안과 격려 받기를!

“엄마, 제가 있는 곳을 회색빛의 우울한 모래더미 어디쯤으로 떠올리진 말아주세요.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운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 주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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