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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이야기 ① - 장터길

중앙일보

입력

삶의 복판으로 난 길

상상해보자. 물건을 사기 위해서 꼬박 며칠을 기다렸다가 위험한 고갯길을 몇 개씩 넘어 장터까지 찾아가는 길을. 이 길은 무언가를 팔러 가는 장삿길이었고 생필품을 구하러 가는 구호의 길이었다. 그 뿐이랴, 쌈짓돈을 노리는 산적들을 잘 피해 다녀야 하는 고행길이기도 했다.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아무래도 생소한 이야기들. 하지만 조선 사람들에게는 장터로 향하는 행위가 그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운 소풍이자 모험이었다.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상점 체계가 없었으므로 매 5~6일 간격으로 장이 열렸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내수공업 제품을 물물교환하거나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며 삶의 질을 더욱 높이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장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고, 그래서 서민들에겐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서민들만 바빴던 것은 아니다. 정부에서는 장터의 속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나라의 시책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으며 백성의 민심을 살피곤 했다. 나라와 백성간의 보이지 않는 정치적 피드백이 늘 존재했던 것이다. 백성들 보란 듯이 장터 한 가운데에서 반역자의 처형이나 회술레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민중들도 이에 지지 않고 괘서나 벽서를 이용해 구조적인 불만이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외에도 장터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또 다른 기능에 오락적인 요소를 빼 놓을 수 없다. 김홍도의 민화에 잘 나와 있듯이 점괘나 골패, 투전과 같은 잡기판은 장터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투기에 빠져 애써 준비해온 물건이나 돈을 탕진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으니 나라에서는 그 보다 더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를 장려했는데 그것에는 사당패, 걸립패 와 같은 풍물놀이 패거리들의 공연이었다. 농경사회에 활력을 더해주고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문화생활까지도 제공했던 장터. 이곳에서의 하루를 즐기기 위해 당시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장길의 루트를 알고 있어야 했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으니 장터로 향하는 당시의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모두가 워크홀릭이었던 셈이다.

가까운 장터의 경우에는 한결 수월했겠지만, 자신의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장터를 향할 때는 그 여정을 어떻게 다 기억했을까? 민간인들의 노하우는 기발하고도 다양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선배들의 노하우로 첫길을 잡은 후 길목 중간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길동무가 없는 한적한 길에 들어서면 이 방법도 통하지 않으니 그때는 길 초입의 장승이나 돌무지, 비석, 정자목, 성황당 등 도움이 되는 이정표를 적극 활용했다. 초기에는 이 방법이 꽤 유용했다. 하지만 화폐의 발달로 인해 다양한 지역에 더욱 크고 훌륭한 장터가 많이 생겨나 기존의 민간 내비게이션에 한계가 생겼다.
그리하여 조선후기부터는 지리지와 읍지가 본격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했다. 각종 지리지에는 장길로 향하는 주요 길목의 여정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경제 변화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이전의 지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시명이 정확히 표기되어 장시개설 상황까지 곁들여 있는데 이로서 장터의 기능이 당시의 사회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편찬된 각 지방의 읍지에는 계속해서 상업 분야에 관한 내용이 보완되는데 도로를 새롭게 분류하여 정비하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장터로 향하는 길을 정비하는 것은 유통구조 체계를 탄탄히 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 지방의 장터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망이 생기게 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신경준의 ‘도로고’에 잘 나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간선도로망은 6개의 큰 길과 그 길에서 나누어지는 수많은 갈래 길로 구성됐는데 각 기점마다 주요 지선과 경유지가 잘 표시돼 있다. 경유지는 읍치를 비롯해 주요 취락과 고개, 하천, 산봉 등과 교량, 진도, 역, 원, 참, 점막, 장시 등 교통과 상업에 관한 내용까지 곁들여져 도로와 장터와의 관련성을 포함한 상업계의 발전상을 잘 보여준다.
영조 대에 들어서서 편찬된 지리지는 한층 더 발달된 것이었다. 각 고을의 경계며 도로망 등이 더욱 자세히 기술됐으며 지역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샛길까지 정리됐는데 이는 점점 더 발달하는 상품화폐경제로 인해 더 구체적인 지도를 필요로 하는 상인들이나 여행객들의 요구에 의해 나온 결실이었다.
훌륭한 지리지의 보급으로 인해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욱 활기를 띄어 지도상에 표시된 소로와 지름길들이 수백 년간 애용되었다.

백성들의 삶이 소란스럽게 무르익었던 장터. 보잘 것 없는 산나물에서부터 시작해서 비싼 비단까지 각종 물품이 거래되었던 유통경제의 중심지인 이곳은 물품의 교역뿐만 아니라 지역 간의 문화와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호흡의 장이었다. 물건을 열심히 사고팔고, 또 가끔은 주막에 들러 국밥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 세상을 다 얻기도 하고, 재수가 없으면 투전판에 끼어들었다가 빈손으로 다시 집으로 향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장터가 있었기에 그들의 삶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도움자료 - 김대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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