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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세계화 가로막는 서툰 외국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 외국관광객이 한국에서 겪은 불편을 낱낱이 적어 서울로 띄워 보냈다.친절한 지적에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낸 것은 좋았으나『이따위 편지는 다시는 써 보내지 마시오』라는 무례한 말로 편지를 맺었다면 그 외국인은 기가 찰 일 아니겠는가 .이런 일이한국방문의 해에 실제 벌어졌다는 보도(中央日報)였다.우리네 편지끝에 흔히 붙어 나오는『그럼 이만 줄입니다』를 서툰 영어(then stop writing)로 옮긴다는 것이 명령형으로 둔갑하는 통에 어이없는 화를 부른 것이 다.「어」와 「아」자는 백지장 차이라지만 우의(友誼)를 적의(敵意)로 돌릴수 있는 것이 언어의 힘이다.
고려대학교의 인촌(仁村)기념강좌라 하면 세계석학들이 한국에 와서 경륜을 펴는 명강좌로 여러 해를 거치며 자리가 잡혀 간다.지난해 가을 뉴욕 타임스의 아서 설즈버거 2세가 이 강좌의 연사로 왔을 때 일이다.그의 강연을 통역하기 위해 영어에 능통한 언론학교수가 그를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강연장에나타난 설즈버거는『나를 통역해 줄 사람을 직접 데리고 왔다』고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관가(官街)의 바이블」로 통할 만큼영향력이 큰 권위지(紙)가 정확 을 생명으로 삼기 때문이라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날림공화국」에 대한 외국인의 선입견 때문은 아니었을까.10.26하면 뭇사람이 궁정동만찬장을 떠올리지만뉴욕 타임스에 실린 한 토막 인터뷰기사가 사대주의 사상논쟁에 불을 댕겨 YS제명 ,부마(釜馬)사태로 불어났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한 줄의 언어가 현대정치사를 바꿔 놓는 기폭제가 됐으니 이 땅에서 설즈버거의 낱말은 한 자인들 예사로울 수없었으리라.요즘 신춘 TV대담프로에는 언변 좋은 지구촌의 명사(名士 )들이 줄줄이 출연하고 있다.헌팅턴의 문명충돌론,스칼라피노의 남북진단으로부터 나카소네 前일본총리에 이르기까지 초거물급으로 이어진다.세계화의 물결이 브라운관에도 넘실,봇물이 터졌다고 야단이다.
그런데 지난번 MBC-TV의 신춘대담에 나섰던 레이니 주한미국대사의 심기는 몹시 언짢았다.다시는 TV인터뷰에 나가고 싶지않은 심정일지도 모른다.현홍주(玄鴻柱)前 주미대사와 카메라 앞에 마주 앉은 레이니대사는 북한이 제네바합의에 서명한 것은 곧주체사상을 떠받치고 있는 핵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번역을 통해 시청자에게 나간 내용은『북한이 주체사상을 포기했다』는 것이다.「핵 포기」가「주체사상 포기」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신문들도 덩달아 미국대사의「주 체 포기」발언을 받아 실었다. 표현의 차이 속에 두 나라의 선입견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보여주는 본보기였다.미국대사는 주체사상보다 핵,핵보다 北-美합의를 강조한다.한국언론은 거꾸로 북-미합의보다 핵,핵보다 주체사상 간판을 내렸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언어의 장 단에 불신의골은 팬다.새 시대의 TV는 정보와 여흥이 범벅된「인포테인먼트」라지만 대학원 강의실에서도 지루할 정도의 딱딱한 소재로 안방쇼를 꾸밀 때는 정보의 굴절이 아찔한 경우가 있다.쇼가 정보인지,정보가 쇼인지 헷갈린다.한국 TV 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소말리아 전쟁개입의 실패가 극성 맞은 TV탓이라고 떠들썩할 때조지 케넌이 한 말이 생각난다.냉전의 창시자며 미국외교의 대부격인 케넌은 TV가 고삐를 쥐면 외교는 망친다고 개탄하면서「때늦은 지혜」(hindsi ght)를 일깨웠다.
그것은 무한한 언어의 힘이다.언어의 잠재력과 함께 분별력-갈고 닦고 절제된 언어의 선택이 아쉽다는 것이다.불신을 심는 것은 언어다.서울은 워싱턴을 믿지 않고 미국은 한국을 믿지 않는다.믿지 않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南은 통일비용 ,北은 체제붕괴에 겁을 먹는다.흡수통일이다,한국형이다 겁을 주면 줄수록 북한은 미국에 매달린다.그럴수록「한국배제 북-미직거래」는 깊어지고 南도 미국에 업힌다.중국에도 매달려야 한다.남북한 엘리트들의 피해의식이 더딘 통일,어쩌면 분단 의 영구화로 치닫게 하는 위험요소라는 것이 인촌강좌에 왔던 브레진스키(前백악관안보보좌관)의 경고였다.언어는 불신의 삼각관계를 매개하는 촉매제다.
남북간 불신을 푸는 것도 끝내는 그 언어의 마력일 것이다.탈(脫)냉전은 말의 전쟁,피 흘 리지 않고 싸우는 말전쟁이다.세계화는 외국어의 숙달에 그쳐서는 안된다.경쟁보다 협력,날림이나 감정보다 인내심,세련.절제된 언어감각을 요구한다.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한반도의 통일기회는 비켜 갔지만「논(non)제로섬게임」을 살아갈 우 리의「때늦은 지혜」는 언어의 힘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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