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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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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예를 들면 작가 배영환은 길에 버려진 자개장을 주워서 기타 모양의 조각을 만들고, 작가 주재환은 아침에 일어나 동네를 산보하며 남들이 쓰고 버린 물건 중에서 그날 쓸 작업 재료를 모은다. 이들이 버려진 물건을 작품의 재료로 쓰는 이유는 오래된 물건이 가진 기억·흔적이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작업 내용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버려진 물건 안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작가가 수집한 작품의 재료에는 그 물건이 만들어지고 사용돼 온 이야기들, 그리고 그 물건이 버려진 경위가 그대로 담겨 있다. 새로운 물건이나 재료도 좋지만, 오랫동안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고 만들어진 물건에는 시간의 궤적과 기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예술가에게 이런 기억과 흔적은 작품의 주제가 된다. 오래 쓰여짐으로써 망가지거나 고장난 모습, 그 물건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나누었던 흔적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젊은 미술가 중에는 일상생활에서 남들이 흔히 지나쳐버리는 모습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는 작가들이 있다. 가건물, 공원의 벤치, 돗자리, 평상 같은 공간을 잠시 동안 휴식장소로 이용하고 난 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박주연 작업, 한국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평상이 이용되는 여러 장소를 사진 작업으로 보여주는 양혜규 작업, 직업이 없는 젊은이들이 데이트하는 한강 둔치의 여러 곳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이주요 작업이 대표적인 경우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지나쳐버린 풍경은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지만,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지나친 장소다. 또한 바쁜 와중에 잠시 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이동하다가 잠시 머무르거나 휴식하는 공간들은 임의적인 장소지만, 애매모호하고 정체성을 갖지 않은 공간들로서 개인들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이렇듯 예술은 우리 주위·환경과 함께 존재한다. 일상을 주제로 작품을 하는 작가들은 삶 속에서 잊혀진, 버려진 혹은 놓쳐버린 모습들을 재발견하고 주위를 환기시키는 작업을 한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해서 보이지 않는 장소를 드러냄으로써 그 안의 시간 혹은 기억의 파편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산업 발전과 함께 한국은 고속 성장하고 있다. 과도한 발전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에는 그 전에 존재했던 기억의 물건이나 장소들이 존재하지 않고, 유년시절부터 보고 놀고 경험했던 물과 장소들이 산업개발로 흔적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 삶이 배어 있는 기억의 장소가 없어져가는 것은 나의 한 부분이 없어지는 것처럼 개개인의 존재감을 흔들리게 만든다.

없어진 장소나 삶의 모습은 전통과 역사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라진 건물이나 그 장소의 기억들이나 다시 방문할 수 없는 장소는 현실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부분처럼 보이지만, 장소의 집단 기억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은 물론 전통과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기억’은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나의 혹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삶과 생활에서 작품의 요소를 찾는다. 지나쳐버린 중요한 요소들을 작업에서 다룬다. ‘기억’은 우리를 지탱하는 요소며 다시 방문해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장소이다.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술이론

◆약력:미국 크랜브룩 미술대학 서양화과 대학원 졸업. 아트선재센터(서울) 선재미술관(경주) 부관장.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