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梨花莊 사료관리 양자 李仁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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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승만(李承晩)대통령 하와이 망명시절 李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된후 지금까지 이화장을 지키면서 사료를 보관.관리해온 이인수(李仁秀.명지대)교수는 『아버님이 남기신 소중한 사료들을 늦게나마 中央日報에 공개하게 돼 기쁘다』고 했다.
李교수가 中央日報에 공개하는 이화장 비장(비藏)이승만 사진자료들은 33년동안 자신이 보관해 오던 것으로 李대통령의▲국내외독립운동및 미국생활▲상하이(上海)임시정부시절▲외교활동▲한길수(韓吉洙)등 정적(政敵)들▲주변의 여인들등 李대통 령의 궤적을 통해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는 희귀하고 귀중한 연구자료가 될 사진들이다.
이화장에는 사진외에도 1903년부터 1965년 李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비망록등 개인기록▲독립운동시절과 대통령재직시 국내외 동지들과 주고받은 편지▲외국 신문.잡지의 한국관련기사 모음▲한시(漢詩)등 저작물과 휘호등이 있다.
『아버님이 워낙 꼼꼼해 편지나 서류는 꼭 타이핑해 사본을 남겼고 사진도 대부분 찍은 연도와 날짜등 설명을 덧붙였습니다.』李교수가 오늘까지 자료를 보관할 수 있었는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맨처음 이화장에 발을 들여놓았을때 집안 전체가 종이 한장 없이 텅텅 비어있었어요.지붕에는 비까지 새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죠.나중에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경무대에서 李대통령이 쓰시던 물건과 서류등 이화장에 있는 것을 몽땅 쓸어간 것을 알게됐습니다.』 李교수는『당시 목록도 작성하지 않은채 李대통령의 각종 서류.집기.가구뿐 아니라 양말.내의까지 모두 갖고가는 바람에 무엇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화장재산관리인이 李대통령이 애지중지하던 서류뭉치가 든 철제 캐비닛을 다른 곳으 로 옮겨놓아 일부는 지킬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李교수는 李대통령의 유품중 공공서류등은 놔두고 사사로운 것은 돌려달라고 요청했다.69년에 와서야 경남진해 해군기지통제부안 서류창고에 있던 것과 총무처에 보관돼 있던 李대통령 사료를 일부 돌려받을 수 있었다.그러나 타자기등 일부가 진품과뒤바뀌었고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의류나 서류는 좀이 슬어 쓸모없게 된 것이 많았다.
李교수는 이 자료 외에도 李대통령의 국내외 동지를 찾아다니며개인소장 자료들을 찾아냈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Archives)에 가서도 관련 자료를 모아왔다.또 李대통령과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생생 한 증언을 녹취한테이프도 수백개가 된다.李교수는 李대통령 사료가 혹시 좀이라도슬까 방안 온도.습도까지 신경쓰면서 애지중지 보관해 왔다.
『사료의 3분의2 이상이 영문자료이고 나머지는 국문이나 한문.국한문혼용체로 돼있습니다.게다가 친필로 쓴 자료는 초서체가 대부분이어서 이를 제대로 분석.정리할 수 있는 학자를 찾지못해지금까지 묵혀두었던 겁니다.』 이화장 비장 사료는 현재 한림대유영익(柳永益)교수가 분석.정리중이며 작업이 끝나는대로 학계에공개할 예정이다.
〈鄭載憲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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