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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토 죽음이 민주화 열망 불댕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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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7일 오전 이슬라마바드 중심부 85번가의 파키스탄 인민당(PPP) 당사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하와와 여성 수공예 협회장을 맡고 있는 키스와르 나히드 여사. 파키스탄 최대 도시인 카라치가 고향으로, 평소 동향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현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당사에서 이브네 무하마드 리지즈 중앙서기를 만나 다음달 18일로 예정된 총선에서 PPP 후보를 위해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의 열성 팬이었던 그가 야당인 PPP의 지원에 나선 데는 사연이 있다.

 “지난해 12월 27일 시내 한 전시장에서 각종 여성 수공예품 전시회를 열 예정이었지요. 파키스탄 각 지방에서 여성들이 만든 수많은 수공예품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요. 그러나 부토 전 총리가 피살됐다는 소식에 단 한 명의 관람객도 오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전시회를 보류하고 애도기간을 마련했지요. 그동안 줄곧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토 여사가 피살됐다고 해서 어떻게 단 한 명의 관람객도 오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요. 결론은 부토 여사가 국민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다음달 총선에서 PPP를 돕기로 한 겁니다.”

 나히드 여사는 10여 일 동안의 추도를 위해 보류했던 전시회를 곧 열기로 했다. 전시장에는 부토 여사가 추구하고자 했던 각종 프로젝트 소개 책자를 비치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지난 5일 오전 당사 1층 강당에서는 20여 명의 젊은이가 묵도와 토론을 벌였다. 절반은 기존 PPP 당원이고 나머지는 부토 피살 이후 총선 자원봉사를 자청한 젊은이들이다.

파키스탄인민당(PPP) 당사 앞 잔디밭에서 당원과 시민들이 부토 여사 추모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최형규 특파원]

 라시드 라우프(23·은행원)=“난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부토 여사가 피살된 후 그의 전기를 읽으면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당원 등록을 마쳤다. 다음달 18일 총선을 통해 부토가 아니라 무샤라프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시티아크(26·교사)=“학교에서 부토나 민주화를 얘기하면 해고다. 그러나 앞으로는 간접적으로 학생들에게 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교육할 생각이다.”

 지난해 12월 27일 부토 전 총리가 피살된 이후 PPP 당사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다. 리지드 중앙서기는 “일주일 전부터 하루 평균 30여 명이 당사를 찾아와 당원 등록을 원하거나 총선 자원봉사를 자청한다”고 말했다. 부토 여사의 죽음이 시민들의 민주화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당사 밖에선 부토 영전에 조화 한 송이 올리기 운동이 한창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다. 6일 오후 PPP 당사에 가기 위해 임대한 차량의 운전사가 “왜 꽃 한 송이를 가지고 가지 않느냐”며 기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는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부토 여사 영전에 조화 한 송이 바치는 게 그의 고귀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강조했다.
 
반면 지나친 부토 추모와 PPP 열풍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7일 오후 국회의사당 앞에선 친PPP 계열인 무슬림 민주화 단체 인민민주전선(PDE) 소속 회원 30여 명이 무샤라프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 일부 시민이 항의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자신을 집권여당인 무슬림리그(PML-Q) 소속이라고 밝힌 시민 세 명은 “부토 여사 피살은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대통령까지 그만두라는 시위를 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라며 “부패 전력이 많은 PPP가 집권하면 나라가 더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시위대와 10여 분간 말싸움을 벌이다 차량을 타고 사라졌다.

 퇴역 군인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군 참모총장을 지낸 미르자 아스람 베그 예비역 장성은 6일 “PPP는 국민들의 부토 추모 열기를 이용해 마치 죽은 부토가 국가를 살리고 민주주의를 가져올 것처럼 선동적인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슬라마바드 데일리 타임스의 에자즈 하이더 편집인은 “부토 여사 피살 이후 파키스탄 국민의 내면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민주화 초석을 다지기 위해선 부토 피살에 대한 공정한 수사와 이슬람 당파 간 화해와 협력, 그리고 공정한 총선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실현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슬라마바드=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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