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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 높지만 눈치 ‘제로’인 고기능 자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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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14면

또래와의 대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자폐 성향의 아이들은 외톨이가 되기 쉽다. [중앙포토]

한 엄마가 어린아이를 자동차 뒷좌석의 카시트에 앉힌다. 꼼꼼하게 카시트의 벨트를 점검한 뒤 아이의 이마에 키스해 주는 엄마. 행복한 듯 웃음짓는 아이의 모습을 배경으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아이가 교통사고로 사망에 이를 확률은 2만3000명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폐 증세를 갖고 있을 확률은 150명 중의 하나입니다.”

말 잘하고 성적도 좋은데…

미국의 대표적인 자폐장애인 부모 단체 오티즘 스피크스(Autism Speaks)가 지난해부터 미국 전역에 방영하고 있는 TV광고다. 아이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아이가 프로스포츠 선수가 될 확률은 1만분의 1, 자폐 증세를 갖고 있을 확률은 150분의 1”이라고 비교하는 광고도 있다. 자폐장애를 가진 아이가 이렇게 많은데도, 아이의 교통안전이나 재능개발만큼 신경 쓰지 않는 부모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다. 2006년엔 아동 100명 중 1.16명이 자폐장애를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영국의 저명한 의학전문지 랜싯에 발표되기도 했다.

자폐 전문가인 미 예일대 의대 소아정신과 김영신 교수는 “IQ는 정상(70 이상)이지만 대인관계와 같은 사회성 발달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자폐장애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특히 지능이나 언어능력 모두 정상적인 아스퍼거증후군은 학교 등에서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진 부모가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김 교수는 “증세가 이렇게 다양하기 때문에 최근 국제 학계에선 ‘자폐스펙트럼장애’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며 “조기치료 효과가 높은 편이어서 미국 부모들이 정보 공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다 보니 연구도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티즘 스피크스가 2006년 한 해 동안 자폐 연구에 지원한 돈은 2000만 달러에 이른다.

오티즘 스피크스는 우리나라의 자폐 유병률 조사도 지원하고 있다. 김영신 교수와 루돌프사회성발달연구소의 고윤주 소장, 그리고 조지 워싱턴대의 그링커 교수 등으로 구성된 다국적 연구팀이 경기도 일산 지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 중이다.

자폐장애라고 하면 대개는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처럼 같은 말이나 행동을 이상할 정도로 반복하고, 상대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자해적인 행동을 하는 등 심각한 증세만 떠올린다. 증세가 심하지 않은 경우 정신과 전문의들조차 애착장애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우울증 등으로 잘못 진단할 때가 많다.

#사례1. 명랑하고 호기심 많은 성민(9·가명)이는 2년 전만 해도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똘똘이’였다. 그런데 1학년 첫 학부모회의 때 성민이 엄마는 담임선생님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친구들이 듣든 말든 성민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기계 얘기만 하고, 선생님에게도 쉬는 시간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을 선생님도 할 줄 아느냐며 같은 질문을 집요하게 반복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성민이 엄마는 선생님이 똑똑한 아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성민이는 엉뚱한 질문으로 수업을 방해한다는 등 선생님의 지적이 계속되자 성민이 엄마는 ‘누가 맞나 보자’는 심정으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진단 결과 IQ는 140이나 됐지만 ADHD로 나왔다. 성민이는 약물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금세 증세가 호전되는 다른 ADHD 아이들과 달리 성민이는 아무리 약의 용량을 늘려도 차도가 없었다.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최근에야 아스퍼거증후군임을 확인했다. 사회성 발달 치료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또래와의 대화 능력이 늘면서 성민이는 자신감을 많이 회복했다.

#사례2. 주부 이진경(37·여·가명)씨는 3년 전 아들 영준(7·가명)이가 어린이집에서 혼자 교실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등 ‘통제불능’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병원에 가서 받은 진단명은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관심과 사랑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해 생긴 ‘애착장애’.

맞벌이를 하던 이씨는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에게 매달렸다. 한 번에 7만원씩 하는 놀이치료를 2년 가까이 받았다. 영준이는 지하철 노선도에 관심이 많아 그걸 보다가 한글을 혼자 깨우칠 만큼 똑똑했지만, 다른 사람과의 대화 능력은 거의 제로였다. 길가에서 몸집이 큰 여성을 보면 다 들리는 목소리로 “저 아줌마는 왜 저렇게 뚱뚱해”라고 말해 이씨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 탓’이라는 죄책감에 이씨마저도 점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됐다. 그러던 중 다른 병원에서 영준이가 아스퍼거증후군 진단을 받은 뒤 그룹치료에 참가하면서 이씨 모자는 안정을 찾고 있다.

고윤주 소장은 “증세가 심하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 성적도 나쁘지 않아 부모가 알고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고학년 부모들은 치료보다 공부를 앞세우다가 아이를 ‘왕따’ 당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아이들은 융통성·눈치가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며 “아이가 사회적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상담소 등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나 선생님이 우선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상황연습 등을 시켜주면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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