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 ① 노동과 독점자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호 14면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9세기를 ‘혁명의 시대’로, 20세기를 ‘자본의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거대화·독점화 경향을 보여 왔는데, 비판적 노동연구가인 해리 브레이버만은 1973년도 저작 ‘노동과 독점자본’ 에서 독점 자본주의 체제에서 날로 퇴화하는 노동 현실을 ‘탈숙련화(deskilling)’라는 주제하에 명쾌히 진단한다.

이 책의 기본 명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가는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통제 가능한 상태로 변형시킴으로써 이윤 확대라는 본연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한다. 둘째, 경영의 목표는 새로운 노동 통제 수단을 개발하는 데 있다. 셋째,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을 무력화시키는 수직적 분업이 가장 효율적으로 촉진된다. 이들은 곧 숙련노동을
저렴한 형태의 부분노동으로 분할하려는 자본의 의지를 담은 것으로, 탈숙련화는 바로 그런 의도가 성공적으로 실현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자본이라는 생산수단을 제공해 상품생산을 종용하는 상황을 상정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이론과 본원적으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브레이버만의 공헌은 20세기 후반의 근로세계에 마르크스주의 노동론을 접목시켜 현대적 근로 상황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촉발시켰다는 데 있다. 특히 그는 과학지식이 생산활동에 목적적·체계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19세기 말 과학기술혁명기 이래 과학기술이 자본의 힘에 복속되면서 탈숙련화가 가속화돼 왔음을 역설한다.

노동과 독점자본, Labor and Monopoly Capital 해리 브레이버만 지음, 1973, 까치

탈숙련화의 가장 결정적 대목은 머리와 손 혹은 정신과 육체의 분할로 비유되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separation of conception and execution)’라고 할 수 있다. 죽은 노동인 자본에 의한 산 노동의 지배로 표현할 수 있는 우려스러운 사태가 첨단 생산기술 및 경영기법이 속출하는 현대사회에서 보다 심화돼 가고 있다는 것이다. 브레이버만은 테일러리즘의 재론을 통해 그것이 과학적 관리가 아닌 노동통제 기법의 일환임을 알리고자 한다. 그러한 견해는 대중소비사회라는 환상적 삶의 도래를 예고하던 당시의 주류적 학설과는 전적으로 대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노동을 그 대척 범주인 막강한 독점자본과의 관련성에서 고찰하고자 한 이 책은 근 삼십 년간의 현장 체험에 기초해 쓰여진 학술서로서, 실물적 묘사나 선지적 예견으로 출간 이후 상당 기간 ‘브레이버마니아(Bravermania)’라는 열풍을 일으켰다. 또 노동과정론(labor process theory)라는 비판적 노동연구 학풍을 재활시켰다.

밝은 현실에서 긍정적 이론을 제시하거나, 암울한 시대에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생산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근로 환경 개선과 고임금 체제 확립에 의한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사회 일각에서 간헐적으로 표출되던 근로자 저항이나 노사갈등의 질적 변화를 간파해 학계의 통념을 넘어선 역설적 견해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기술 발전이 직업 기회를 축소시키는 동시에 직무의 질을 격하시켜 일다운 일에 종사하지 못하는 직업 불만자를 대거 양산할 것임을 예보한 선견도 놀랍다.

브레이버만의 진단은 ‘후기 브레이버만 학파’로 통칭되는 후속 학자들을 거쳐 유연축적론·조절자본주의론·노동종말론 등과 같은 이론들로 확장돼 갔다.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한 취업난이나 고용불안, 사회 양극화와 같은 쟁점의 진원이나 본질을 탐지하는 데 적극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신(新)고전=지난 반세기 동안 출간된 책 중 현대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문제의식을 제공한 명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산하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중앙SUNDAY 독자들에게 매주 한권의 신(新)고전을 골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