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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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24면

반들반들 매끄러운 쇼핑몰 플로어를 걸어간다. 옷과 선글라스와 냉장고, 심지어 자동차가 날 좀 봐달라고 아우성친다. 도도한 눈빛으로 ‘구혼자’들을 훑어본 뒤 한 매장에서 찍어둔 아이템을 집어 든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판매원의 찬사는 구매의 면죄부나 다름없다. 드르르륵 신용카드 긁히는 소리에 불현듯 다음 달이면 도래할 청구서가 두렵기도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난 소중하니까.

미국의 현대미술가 바버라 크루거가 풍자한 대로 현대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쇼핑하는 존재다(‘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I shop, therefore I am’). 쇼핑을 부추기고 정당화하는 메시지는 광고를 통해 우리를 24시간 포위하고 있다. 이때 쇼핑은 단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다. 물건에 덧씌워진 이미지가 우리가 소비하고 소유하려는 실체다. 한편으로는 서열화, 다른 한편으로는 차별화의 시도가 숨 가쁘게 이뤄진다.

내가 두르고 있는 브랜드는 남에게 은밀하게 타전하는 나의 정체성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아이팟을 듣고 있는 대학생과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오피스걸, 에르메스 스카프를 두른 큐레이터를 판가름한다. 유기농 식단을 고집하는 주부와 나이키를 신고 활보하는 어린이도 예외일 수 없다.

런던의 이벤트 프로모터 닐 부어맨도 그런 사람이었다. 애플 맥 컴퓨터를 쓰는 것만으로 스스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인 것만 같고, 강인한 인상을 주고 싶을 땐 랄프로렌 폴로셔츠를 입고 나가는. 에비앙 생수만 마시는 이유가 단지 그 이름만으로도 그를 더 건강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듯하기에.

그랬던 그가 그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구찌 셔츠, 버버리 코트, 아디다스 운동화, 빈티지 스와치, 루이비통 지갑, 블랙베리 전화기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른바 브랜드 화형식(bonfire of brands). 브랜드 중독에서 벗어나고 소비주의와 광고의 부당함을 설파하기 위한 희생 제의 같은 것이었다.

그 6개월 전부터 블로그를 개설해 생각의 준거를 알렸고, 세상과의 약속을 밀고 나갔다. BBC를 비롯한 숱한 언론 매체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힘겨운 극복 대상이었다. ‘소비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의 기록이 바로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다.

아이러니는 화형식 이후.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부어맨은 다시금 갈등에 빠져든다.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여 패스트푸드나 명품의류를 사주지 않을 경우 아이는 “또래들과 가까워지는 데 필요한 신분의 상징물”을 잃게 된다. 아디다스 운동화와 푸마 가방이 없어 놀림을 받았던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그로선 힘겨운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브랜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다수 ‘평범한 소비자’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는 몰라서 속는 게 아니라 알기 때문에 속고 속이는 것이라는.
그 생각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책이 『쇼핑의 철학』이다. 이 프랑스 철학교사의 철학에세이에서 쇼핑은 “파멸해 가는 근대성의 병적 징후”로 규정된다.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개인의 실존은 오직 자신에게만 달려 있다. 자유가 주는 불안감 때문에 개인은 쇼핑을 통한 정체성의 유희에 빠져든다. 내가 무엇을 걸치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조각난 개인’이 ‘조각난 현실’을 이용하고 즐기는 게 쇼핑이라는 얘기다.

삐딱하게 보자면 소비 사회에 투항하는 항복선언문처럼 다가오겠으나, 어차피 버는 돈은 무언가를 사는 데 쓰이도록 구성된 세계에서 이보다 더 합리적인 ‘인지부조화의 해결’도 없을 것이다. 그래선지 요즘 쇼핑의 심미적 효용을 강조한 책이 잇따라 나온다.

『쇼핑 테라피』(아만다 포드 지음, 넥서스북스) 『똑똑한 여자는 쇼핑몰로 출근한다』(에이미 엘리엇 지음, 이스트북스) 등은 모두 쇼핑의 자기 치유 능력에 주목한다. 쇼핑은 기분 전환이 될뿐더러 타인과의 관계를 섬세하게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며, 선택의 자유의지를 고양시킨다고 일러주는 이런 책은, 심지어 쇼핑 목록에 교양인의 증명서와도 같은 ‘책’을 추가했다는 부가적 기쁨까지 주니, 정녕 살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uy or not to buy, that’s the question).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닐 부어맨 지음, 최기철·윤성호 옮김
미래의창 펴냄, 352쪽, 1만2000원

『쇼핑의 철학』
프레데리크 페르넹 지음, 백선희 옮김,
개마고원 펴냄, 165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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