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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득점기계는 누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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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17면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오른쪽)가 24일(한국시간) 뉴욕 닉스와의 경기가 끝난 뒤 로니 튜리아프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이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통산 2만 득점을 돌파했다. [뉴욕 로이터=연합뉴스]

미국프로농구(NBA)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가 24일(한국시간) 뉴욕에서 열린 뉴욕 닉스와의 경기에서 39점을 넣어 통산 2만19점을 기록했다. 29세122일 만에 2만 점을 넘어선 브라이언트는 윌트 체임벌린(29세134일)이 갖고 있던 최연소 2만 점 돌파 기록을 경신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29세326일째에 2만 점을 돌파했다. 그럼 브라이언트는 역대 최고의 골잡이인가? 브라이언트의 기록은 ‘NBA 사상 가장 위대한 득점 기계는 누구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되살려냈다. NBA의 전설 조던(가드)·체임벌린(센터)·칼 말론(포워드)을 통해 그 기준을 점검한다.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NBA 최연소 2만 점 돌파

1990년대에 시카고 불스를 여섯 번 정상으로 이끈 조던은 NBA에서 세 번째로 통산 3만 득점(3만2292점)을 돌파한 선수다. 15시즌 동안 10차례 득점왕이 됐고, 경기당 30.12점(1위)을 기록했다. 866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1위)도 했다. 그는 1984년 데뷔해 은퇴할 때까지, 꾸준히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간 노력파였다. 신인 시절의 조던은 돌파 위주의 경기를 즐겼다. 데뷔 후 3년간 3점슛 성공률은 10%대였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고 NBA가 수비 위주로 바뀌어 가자 페이드어웨이 슛(몸을 뒤로 젖히며 던지는 슛)으로 수비수를 농락했다. 조던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젊은 선수들을 상대로 50점 이상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득점력에만 있지 않다. 조던은 승부근성이 강했고, 올라운드 플레이를 했다. 수비도 강했다. 9번이나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선발됐다. 동료의 슛 기회까지 돌볼 줄 아는 여유가 있다는 점도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조던은 통산 5.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이러한 재능들은 동시대에 활약한 도미니크 윌킨스와 클라이드 드렉슬러, 혹은 후배 빈스 카터 등에 비해 월등했다.
 
칼 말론

85년에 데뷔해 19년 동안 말론은 늘 독보적인 득점원이었고, 슈터들의 뒤를 받쳐주는 ‘블루컬러 워커’였다. 통산 3만6928점으로 카림 압둘 자바(3만8387점)에 이어 역대 2위인 그는 항상 25~30득점을 올려줬다. 그의 주 득점 방식은 바로 존 스탁턴과의 픽앤롤 플레이였다. ‘포인트가드의 교과서’라 불렸던 스탁턴과의 콤비 플레이는 유타 재즈를 늘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2m6cm·116.1㎏의 근육질 체격을 앞세워 쉽게 수비를 제압하고 덩크를 하거나 정확한 중거리 슛을 터뜨렸다. 그의 별명은 ‘메일맨(집배원)’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득점을 배달한다’는 뜻이다. 평균 20점을 기록한 파워포워드는 많지만 말론처럼 20년간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준 선수는 없다. 무릎 부상이 심했던 마지막 시즌(2003~2004시즌)을 제외하면 18시즌 동안 10경기만 결장했다. 이처럼 코트 안팎에서 프로다운 자기관리 능력을 보여주며, 항상 재즈를 승리로 이끌었던 말론이었기에팬들 마음속엔 항상 위대한 득점원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윌트 체임벌린

체임벌린은 공격의 역사를 새로 쓴 센터였다. 한 경기 100득점 신화로 유명한 그는 2m16cm의 키를 가진 포워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스피드와 파워가 대단했다. 아마 시절 육상선수를 병행했을 만큼 빨랐고, 점프력도 좋아 대적할 자가 없었다. 루키였던 1959~60시즌부터 일곱 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고, 1961~62시즌에는 경기당 50.4득점을 기록했다. 체임벌린은 블록슛 능력도 대단했고 어시스트도 뛰어났다. 리바운드 후 앞 선에 뿌려줬던 베이스볼 패스와 골밑으로 파고드는 동료에게 연결하는 패스가 일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한 득점원’을 논할 때 평가절하되는 이유는 우승 반지와 사생활 때문이다. 그가 등장한 시기는 보스턴 셀틱스의 전성시대였다. 빌 러셀이 이끈 셀틱스가 11번 우승한 반면, 체임벌린은 두 번에 그쳤다. 51.1%에 불과했던 자유투 성공률도 문제였다. 압둘 자바 같은 후배들과 말다툼을 벌였고, 여색을 밝혀 큰 존경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체임벌린이 몸담았던 모든 팀이 그의 등 번호를 영구결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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