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얼룩진 한해를 보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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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과연 어떤 말로 올 한해를 압축해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험난한 지난 세월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이 흔히 써왔던 마감 말은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거나「격동(激動)」이란 단어였다.따지고 보면「다사다난」이나 「격동」이란 단어도 얼마나 강렬한 표현인가.그러나 올해만은 「격동」이란 표현마저도 그저 심드렁하게만느껴질 뿐인 그런 한해였다.
하늘에서,땅에서,물에서,심지어 땅밑에서까지 있을 수 있는 사고는 모조리 다 일어났다.자식이 어버이를 죽이고,사병이 장교를길들이고 죽이며,세금을 봐주고 깎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낸 세금을 통째로 꿀꺽 해버리는 세도(稅盜)가 등장하는 등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막힌 사건들도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다.
게다가 날씨마저도 왜 그리 이변(異變)의 연속이었는지 지난 여름의 가뭄과 살인적인 폭염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 정세,국제환경의 변화는 또 얼마나 메가톤級이었던가.상반기 내내 다시 이 땅에 전쟁이 터지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우리들을 옥죄게 하더니 김일성(金日成)의 갑작스런사망,北-美협상의 엎치락뒤치락과 타결,WTO체제 의 출범,12.12기소유예 파동,전면개각등 1년 내내 하루나마 조용한 날도,한가히 숨돌릴 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도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졌다.우리들이 그토록 충격을 받고 좌절하고,분노하며,허탈해했던 사건.사고들도 추억이 돼버리는 시점이다.눈금이 있을 수 없는 연속적인시간의 흐름에 인위적 눈금을 그어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맞는 것이야말로 우리들 인간만이 갖는 슬기이며 축복이다.이 슬기와 축복을 디딤돌로 우리 모두 새로운 의욕으로 다시 시작하자. 다만 모든 아픈 기억들을 떨쳐버리면서도 올해 우리들이 겪었던 사건과 사고들이 준 교훈만은 다시 한번 되새기자.잇따른 대형사건.사고를 보면서 외국의 언론들은 우리가 「과속성장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한 신문은 대형 사건과 사고들이 「만기도래(滿期到來)한 미지급청구서」들이란 표현도 썼다.
이는 감정적으로 반발할 것이라기 보다는 겸허히 인정해야할 비판이고 충고다.역사에는 비약이 없다고 한다.그렇다면 고속성장의 대가는 적어도 한번은 치러야 하고,그 요구가 집약적으로 나타난것이 바로 올해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들의 물질적 기반도 웃자란 식물처럼 되어 있지만 의식세계역시 6.25때의 생존윤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성장의 틀,새로운 삶의 윤리를 갖춘 새 패러다임을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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