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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하나로 가난·콤플렉스 넘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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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04면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의 졸업 기념 사진. 흰색 점선 안이 이명박 당선자. 친구 김창대씨 제공

경북 포항의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지금부터 62년 전 겨울 일본 오사카에서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당시 4세)의 가족을 맞았던 겨울 바다는 지금보다 더 추웠을 것이다. 그의 가족이 탄 부산행 귀국선은 대마도 인근에서 침몰했다. 이 당선자의 큰누나 귀선(77)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어머니가 명박이를 살리기 위해 끈으로 꽁꽁 묶어 업고 있었다”며 “그 와중에도 명박이는 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이 당선자는 14년간 포항에 살며 초·중·고교를 마쳤다. 가난을 가장 처절하게 경험한 것도 이곳이다. 포항은 이명박을 어떻게 키웠을까.

‘신화의 뒷면’에 감춰진 성장기

이명박 당선자가 중학 시절 살던 포항 북구 덕산동 집. 지금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포항=김선하 기자

“덩치가 반에서 중간이나 됐을까요. 그런데 턱 하니 칠판을 둘러메고는….”
이 당선자의 모교인 포항 영흥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동창 박이득(66)씨는 “그 친구, 당찬 구석이 있었다”고 말했다. 6ㆍ25전쟁 중 시내 초등학교는 죄다 군부대에 수용됐다. 인근 해수욕장 소나무 숲이 교실을 대신했다. 칠판 등 수업 용구를 챙길 때면 이명박은 뒤로 빠지는 법이 없었다. 청소 시간에도 그랬다. “빨리빨리 일하고 가자”며 가장 먼저 소매를 걷었다.

박씨는 1965년 이 당선자가 현대건설에 입사한 직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좋은 회사 들어가 월급 받으니 좋겠다고 했지. 대뜸 ‘이봐, 그 회사 내 거야. 내가 남의 월급이나 받으려고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참하잖아’라고 하더라고. 어릴 때와 똑같더라니까.”

이명박 당선자의 포항 동지상고 시절 사진. 가장 왼쪽이 이 당선자. 친구 김창대씨 제공

그러나 가난은 소년 이명박을 점점 내성적으로 만들었다. 원래도 넉넉지 못했던 집안은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 근처 목장에서 일했던 아버지 이충우(81년 작고)씨가 전쟁 이후 실직하면서 더 어려워졌다. 이 당선자는 『어머니』란 책을 쓸 정도로 모친 채태원(64년 작고)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은 적은 많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당선자 일가의 고향인 포항 북구 흥해읍 덕성1리를 찾았다. 시내에서 승용차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이 당선자의 사촌 형수 유순옥(76)씨는 “우리 시삼촌(이 당선자의 아버지)은 참 훌륭한 분이었슴니더”라고 말했다. “내가 시집 와 포항 시내 사는 시삼촌 댁에 인사를 갔어예. 부부가 고물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웬 거지 아이가 웃통을 벗고 지나갑디더. 시삼촌이 이리 와보니라 하고 부르더니 헌 옷을 골라 입히고 잔돈푼까지 쥐어주데요. 그리고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어도 입은 거지는 얻어먹는다더라’면서 그냥 보내요. 지켜보던 시숙모가 ‘저분은 자기 대에 복을 못 받으면 자식 대에서라도 꼭 받을끼다’라고 합디다.”

이명박 당선자의 고교 생활기록부. 국어·수학은 3년 내내 ‘수’였지만 일부 상업 과목은 ‘미’를 받기도 했다.

당시 이 당선자 가족은 남을 도울 형편이 아니었다. 유씨는 “집에 가보니 판때기를 얼기설기 얹은 게 꼭 개집 같더라”며 “점심 때 밥을 차리려고 물어보니 ‘우리는 귀국 후 점심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좀 더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중학 시절 친구들은 “명박이네는 집에 부엌이 없어 툇마루에 구멍을 뚫고 거기 화로를 넣어 밥을 해먹었다”고 전했다.

이 당선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성실하고 정직한 분이었지만 돈 버는 재주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기 싫어하던 당찬 소년과 가난하면서도 한없이 사람 좋은 아버지의 관계가 어땠을지 짐작할 만하다.

소년 이명박을 괴롭힌 것은 가난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일하던 목장이 동지상고 재단 이사장 소유여서 그의 두 형은 이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고교에 진학할 때는 사정이 달랐다. 어머니는 “우리 형편에 너를 고등학교 못 보낸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수재 소리를 듣던 둘째 형 상득(72ㆍ현 국회부의장)을 위해선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고 있었다.

친척들은 “이 당선자 가족이 단칸방에서 발조차 제대로 못 뻗고 잘 때도 이 부의장이 밤에 공부할 자리는 꼭 남겨뒀다”고 전했다. 이 당선자는 나중에 “형들 교복과 옷을 물려 입은 것도 억울한데 이젠 형들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 가는구나… 가난과 형들이 원망스러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장학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형들이 다닌 고교의 야간부에 들어갔다. 형들에 비해 얼굴이 못났다고 생각했던 것도 큰 콤플렉스였다.

이 당선자가 가난과 형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두 개의 산을 넘을 수 있게 해준 힘은 뭐였을까. 포항중·동지상고 동창인 김홍대(66)씨는 “아마 자존심이었을 것”이라며 “명박이는 행상하고 리어카 끈다는 티를 전혀 안 내 솔직히 잘 몰랐다”고 말했다. 당시 동지상고 야간부는 2∼3년씩 진학이 늦은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 당선자처럼 중학을 마치고 바로 진학한 경우가 외려 드물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든 지려 들지 않았다. 고3 때 벌어진 시험 거부 사건 때도 그랬다. 고교 동기 김칠복(68)씨의 말이다.

“학교 배구부가 대구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했어요. 나도 선수였는데 경기 뒤 학교에 와 보니 시험을 친다더라고. 우리는 공부 하나도 못 해 시험 못 치겠으니 다들 답안지에 이름만 써서 내자고 내가 ‘백지 동맹’을 주동했지. 선생님들이 발칵 뒤집어졌어요. 걱정을 하고 있는데 선수도 아니었던 명박이가 오더니 ‘이름 다 썼는데 (주동한 너는) 왜 안 나가느냐’고 하면서 교실 밖으로 뚜벅뚜벅 나가더라고. 덩치도 작고 공부만 하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내가 좀 창피했어요.”

이 당선자가 중학 시절 살았던 포항 북구 덕산동 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일제 시대 절터였던 이곳에는 극빈층 15세대가 모여 살았다. 금방이라도 지붕이 내려앉을 것 같은 이 집엔 지금도 형편이 어려운 10여 세대가 옹기종기 살고 있다. 인근에서 공인중개사를 운영하는 최상택(51)씨는 “집은 아예 값을 매길 것도 없고 땅값도 평당 100만원이나 할까 말까”라고 말했다.

이 당선자가 고교 1학년 때 뻥튀기를 팔던 북구 학산동 포항여고 앞길은 말끔하게 포장돼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교 친구 강원구(67)씨는 “당시 장사하던 모습을 종종 봤는데 명박이가 대통령이 되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시절 뻥튀기 기계가 있던 자리의 맞은편 길에는 이번 대선 기간 내내 후보들의 포스터가 나붙었다. 공교롭게도 포스터 속 이명박의 시선은 자신이 장사하던 바로 그 위치를 향하고 있었다.

이 당선자는 59년 12월 고교 졸업을 앞두고 포항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77년 현대건설 사장 발령을 받은 뒤 처음으로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고 밝혔다. 정신 없이 바쁘기도 했겠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가난과 콤플렉스가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그가 서울에 와 보니 먼저 상경한 부모님은 이태원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 놓고 채소 노점을 하고 있었다. 60년 봄이 되자 중·고교 시절 그와 가장 친했던 포항 친구 김창대(65)씨가 상경했다. 이 당선자 대신 받은 고교 수석졸업 상장과 부상인 탁상시계를 들고 왔다. 김씨의 말이다.

“명박이가 갈 데가 없으니 내 자취방에 와서 같이 공부했는데 전날 아무리 심한 막노동을 했어도 오전 4시면 일어나 공부하더라고. 고려대 가서도 명박이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리포트 제출 때면 친구들이 그 사람 걸 베꼈다고 그래요.”

대학 친구가 기억하는 이명박은 어떤 사람일까. 고려대 경영학과 동기인 엄종일(65) 전 건영 사장은 “워낙 조용한 사람이어서 등록금 낼 때가 돼서야 명박이가 어렵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시골에서 소 판 돈을 올려 보내니 뭉칫돈으로 내는데 이 친구는 여기저기서 모아온 듯한 꼬깃꼬깃한 돈을 냈다”는 것이다.

청년 이명박의 삶이 달라진 것은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다. 본인은 나중에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성격을 바꾸고 싶어서 출마했다”고 말했다. 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를 주동하고 이 일로 반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을 짓누르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초고속 승진을 계속하면서 가난도 사라져갔다.

이 당선자는 올해 5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강한 사람 만나면 무한히 강한 힘을 발휘하는데, 되게 약한 사람 만나면 흐물흐물해진다”고 말했다.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경험한 가난과 콤플렉스 때문일까. 김창대씨는 “이 당선자의 현대건설 입사 초기에 친구 세 명이 대구에서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다”며 “당시 술집 여종업원이 ‘집안 형편 때문에 여기서 일한다’고 하자 이 당선자가 주동이 돼 돈을 거둬 빼줬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 시절 이 당선자가 기르던 잡종개를 잃어버리고 어찌나 슬퍼하던지 놀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초·중학교 동기이자 고려대 동문인 방무성(66)씨도 “극장 간판 그리던 고향 친구가 80년대에 무릎을 크게 다친 일이 있다”며 “당시 명박이가 수술비 몇 백만원을 모두 부담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방씨는 자신이 박정희 정권 시절인 71년 야당인 신민당 소속으로 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을 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서슬 퍼렇던 시절에 야당으로 나왔으니…. 다들 겁먹고 외면하는데 명박이가 자기 서너 달치 월급을 털어 선거 자금을 보태줍디다.”

이 당선자는 75년 현대건설 부사장이 된 날 김창대씨를 찾아가 술을 마시며 “성인이 된 뒤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포항의 어린 시절과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김씨는 기자에게 “맨주먹으로 그 자리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포항 촌사람의 자존심이 마침내 가난과 콤플렉스에 한판승을 거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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