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뽑아 읽는 즐거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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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20면

김태헌 작, ‘미키 부처’, 2007

서울 가회동 ‘갤러리 스케이프’에 들어선 관람객은 잠시 주춤할지도 모르겠다. 여느 전시장과 다른 분위기 때문인데, 이를테면 서점에 들어선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화랑이 벽에 그림을 걸지만 갤러리 스케이프는 책장을 여러 개 만들어 작품을 꽂아놨다. 조심스럽게 캔버스를 꺼내드는 사람들 얼굴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엽서만 한 것부터 공책 크기까지, 마치 누군가 쓴 일기나 수첩을 읽는 기분이 든다. 내용도 그렇다. 여행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 일상의 자잘한 느낌 같은 기록이 수수한 선과 색으로 보는 이의 가슴으로 다가온다. 작고 가벼운 사각틀을 하나씩 뽑아 손에 들고 그림을 읽는 맛은 옛 친구가 보낸 편지를 보듯 정겹다.

김태헌(42)씨는 이미 2001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전시에서 그림을 뽑아서 읽는 ‘화난중 일기’ 연작을 선보여 화단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은 화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그림보다 드로잉이라 부르길 좋아하는데 드로잉이란 장르가 지닌 자유로움과 부드러움, 혹은 유연함이 작가의 생리와 잘 맞는 듯하다. ‘생활의 발견’이라 부를 만한 나날의 단상을 일기 적듯이 드로잉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전시 제목인 ‘그림 밖으로 걷다’가 품고 있는 뜻이랄까.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딘가 낯익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무렴 그렇지, 올해 중앙일보에 연재됐던 공지영씨의 가족소설 『즐거운 나의 집』에 삽화를 그린 이가 바로 김태헌씨다. 한때 소설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는 그의 삽화는 매일 아침 신문을 펴는 독자에게 하루를 여는 기쁨을 선사했다.

화가는 그림 형식과 어울리게 펴낸 수첩 또는 일기 모양의 10권짜리 도록 마지막 권을 ‘수다방’이라 이름 붙이고 지인들과 나눈 얘기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끔씩 삶은 ‘대략 난감’합니다. 계속해 ‘지점’과 ‘망’에 걸려들기 때문이죠.

이것에 걸려들면 사이는 줄고 평면적 사고를 하게 됩니다…(여기서 벗어나 기존 가치관을 비틀기 위한) 적당한 재료로 나는 걷기·수다·기록·여행·질문·독서 등을 택했습니다.”

그는 걷고, 또 떠난다. 마음 맞는 이와 수다를 떨고, 묻고, 책을 읽는다. 그 나날의 기록이 인도와 중국으로, 집 밖으로, 길로, 그리고 그림 밖으로 걸어나간다. 김태헌의 그림을 보는 일은, 촘촘한 삶의 그물망에 걸린 우리 삶 밖으로 잠시 걸어나가는 즐거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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