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거리의 풍미
사진집에는 이 겸손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진가의 성정이 고스란히 담긴 흑백 사진들로 가득했다. 낡은 건물들은 음전한 톤으로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애조 띤 우울함이 뒤섞인 사진들을 넘기면서도 내가 어쩌지 못한 건 맹렬한 식욕이었다. 저 쇠락한 중국집에선 지금도 여전히 춘장 볶는 냄새가 진동할까, 라는 의구심이 생겼지만, 며칠 뒤 자장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인천 행을 결행하는 걸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물론 조남룡의 사진집이 자장면만을 상상하게 만든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문청’들의 영원한 아이콘이라 불리는 소설가 오정희도 그 대상이었다. 아직까지 기묘한 잔상으로 남아있는 그녀의 단편 <중국인 거리>. “시의 정상에서 조망하는 중국인 거리는, 검게 그을린 목조 적산가옥 베란다에 널린 얼룩덜룩한 담요와 레이스의 속옷들은, 이 시의 풍물이었고 그림자였고 불가사의한 미소였으며 천칭의 한쪽 손에 얹혀 한없이 기우는 수은이었다. 또한 기우뚱 침몰하기 시작한 배의, 이미 물에 잠긴 고물이었다.” 가물가물하지만 ‘중국인 거리’에 관한 이 뛰어난 묘사를 읽었을 때도, 난 예의 없이 자장면을 먼저 떠올렸었다. 궁금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저녁 무렵이 되면 바구니를 팔에 건 중국인들이 모여들었다’는 중국인 거리가 아닌, 중국 사람들이 만드는 자장면 맛은 어떨까 라는 궁금함이었다. 물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중국인들은 ‘우리에게 밀수업자, 아편장이, 누더기의 바늘땀마다 금을 넣는 쿠리, 그리고 말발굽을 울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이었지만, 그런 무지막지한 상상들이 이미 코를 자극한 자장면 냄새를 이길 도리는 없었다.
“우리 집에서부터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언덕이 시작되었는데 그 언덕에는 바란 잉크 빛깔이나 흰색 페인트로 벽을 칠한 커다란 이층집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 보고 있었다. (…) 넓은 벽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창문이나 출입문이라고 볼 수 있는 문들은 모두 나무 덧문이 완강하게 닫혀져 있어 필시 빈집이거나 창고이리라는 느낌이 짙었다.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었다!” 과연 그랬다. 사진집보다 20년은 족히 먼저 쓰인 오정희의 소설 속 ‘중국인 거리’는 사진집 속의 사진과도, 내가 목격했던 그 시점과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폭이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조그만 베란다가 붙은, 같은 모양의 목조 이층집들이 늘어선 거리는’ 지저분하진 않았지만 초라한 느낌은 있었다. ‘이른 새벽 부두로 해물을 받으러 가는 장사꾼들의 자전거 페달 소리와 항만의 끝에 있는 제분 공장의 노동자들의 발길’이 어수선한 활기를 일으킨 흔적은 없이 한산했다. 하지만 인천역 건너편의 언덕 아래로부터 서서히 걸어올라 숨을 급하게 쉴 때쯤 시작되는 중국인 거리의 이국적 흥취는 남다른 것이었다. 어느 골목에서도 볼 수 없는 중국풍 색채(그 새빨간 ‘레드’!)와 홍등, 그리고 한자로 쓰인 낡은 간판들은 분명 이곳이 남다른 거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였다. 공화춘, 풍미, 해안 천주교 성당 교육관, 북성외과 의원, 인천화교학교, 복래춘 등의 건물들이 한적함을 벗 삼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내 산책의 호흡도 여유를 되찾았다. 그런 여유 속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중국인 거리는 묘했다. 결코 이국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시간이 덕지덕지 쌓인 흔적들로 오롯이 서있는 정감 넘치는 퇴적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오정희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있었으며 갑각류의 동물처럼 입을 다문 집들은 초라하게 그러나 대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역사와 남겨지지 않은 기록의 추측으로 상상의 여백으로 다소 비장하게 바다를 향해 서 있다.”고 썼던 ‘외딴 섬’ 같은 ‘중국인 거리’가 비로소 인간의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예의 없는 상상이 길을 가로막았다. 바로 자장면이었다. 그 당시, 거의 유일하게 명맥을 잇고 있던 ‘풍미’ 간판이 코앞에 있었다.
문미루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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